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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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드에서 왕과 함께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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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드에서 왕과 함께

 

찰스 카르르 왕은 스웨덴의 오랜 대학 거리인 룬드에 본부를 두었다.

 

그는 1716년 [28세]에서 1718년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저 분주한 왕이 한 곳에 그렇게도 오래 머무는 일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하가르트 교수의 집에 살면서 교수의 머슴인 그의 어린아이의 교부(敎父)로서 증인참석을 했다.

 

 

찰스는 예의 바르고 공손하여 가신(家臣)을 대우하는데 마음을 썼고 , 가신은 반대로 그를 존경하였다. 그는 또한 경건하였고 교화사 가인이에라 노루드베르이 박사는 적었다. 이 박사는, 왕을 외국과 싸움을 하는 동안 섬겼으며, 뒤에 그의 평생을 썼다.

 

 

거기는 작은 세계요, 질투와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에르쯔 당은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싸움의 영예를 구했고, 백성들의 유익함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런 때 일지라도, 무엇보다도 먼저 나라의 평화적 발전을 바라는 포르헴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누구든지 어떤 자리에 임명되면, 그것은 맞선 당파에게 질투로 인한 보복심을 일게 한다.

 

임마누엘은 벗인 베르나르드 세대호름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그는 왕실궁방국(王室宮房局) 직원이었다. 그는 또 대궐에 리세리우스와 왕의 겪이일(접대역)인 하가르드 목사 같은 친구도 있었다.

 

 

1716년[28세]12월 6일, 포르헴은 왕에게, 스베덴보리에게 무슨 명예로운 자리를 내려주시기를 간원하였다. 만일, 수학을 발전 시켜야만 한다면 그 방면에 이상한 재능을 지닌 자를 쓰는 것보다 더한 일은 없다고 간원 하였던 것이다.

 

 

폐하는 우아한 기림말(찬사)로써 제공된 아름답고 책꾸밈된 『북쪽나라의 다에다루스』를 살펴보고 매우 기뻐했다. 왕은 임마누엘에게 세 가지 자리를 내보이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대로 고르라고 하였다.

 

그중에는 왕실대학과 또 광산국의 임시감사관 자리가 있었다.

 

이 자리를 스베덴보리는 삼가 받고 12월 10일에 그 임명장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포르헴의 조수로 일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것은 포르헴의 권고를 따른 것이었다. 포르헴은, 광산국에는 광업 규칙을 만드는 일 밖에 모르는 임원은 남아나지만, 공학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임마누엘이 그 임명장을 살펴보니 누군가가 그를 속이려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에 쓰여 있는 낱말들은 애매하여서, 광산국에서 정당한 법에 따르는 자리와 봉급에 대한 권리는 결코 확실하지가 않았다. 곧 새 보증서가 나왔으며 그와 함께 스베덴보리에게 자리와 투표권을 특별히 명령한 광산국 앞으로 보낸 문서도 나왔다.

 

 

『나를 적으로 보는 자들은 왕의 테이블에 앉았고, 정부(正副) 두 통(通) 두 부(部)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왕에게는 그 중에서 가장 잘된 것을 드렸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한다.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져 했던 자들은 제 무덤을 팔 뻔했다가 수치를 면하게 되자 맘 놓은 숨을 내쉬었다.

 

그 같은 날, 포르헴은 귀족의 자리로 들리어져 그의 이름은 포르하마에서 포르헴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에다루스』는 몇 주간, 왕의 책상에 놓여졌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찰스 자신이 실제적인 수학 가였으므로 그는 탈곡기와 같은 발명품에서 얻게 되는 큰 이익을 인정했다. 그는 잡지는 스웨덴 말로만 말고 라틴말로도 인쇄했으면 하는 제안을 했다. 이것은 비용 면에서 스베덴보리에게 짐이 되는 일이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던 바닷물에서 소금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실제문제도 왕과 이야기 되었다. 소금의 거지반을 수입에 의존하고, 거기에는 바다의 위험 말고도 전쟁에서 오는 손해도 보내어져서,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은 1톤에 25 다레루라는, 거의 일반 사람들의 손에 넣을 수 없게 값이 껑충 뛰어 올라 있었기에, 찰스 왕의 이만저만한 관심을 끈것이 아니었다.

 

농사꾼 한해의 수입이 6 다레루 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그 값어치가 어떠하였는지는 짐작이 간다.

 

 

그러나 두 사람이 룬드를 찾은 큰 목적은, 말할 것 없이 해군의 마른 뱃도랑(dock) 짓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이며, 그것은 나무로 반 동그라미 꼴의 둑(댐)을 쌓는 일이었다.

 

길이 70피트, 높이 22피트의 이 둑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카르루스 쿠로나의 뱃도랑은, 그것이 바다 미세기흐름(조류)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곳에 지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유럽에는 이것과 어깨를 겨눌만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

 

의논제목에 오른 다른 일은 스웨덴 중앙에서 대서양 해안에 이르는 운하를 뚫는 것이었다. 배가 동해안에서 대서양에 갈 수 있는 단하나의 길은 스웨덴의 헬시그보리와 덴마크의 헬슨 겔 사이에 있는 너비(폭)가 1 마일되는 끼인바다(해협)를 지나는 것이었다.

 

이 끼인바다는 덴마크와 싸우는 동안에는 막혀 버리고, 보통 때에도 덴마크가 청구하는 통행세로 괴로움을 겪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큰 문제는 이 좁은 끼인바다를 지나지 않고 대서양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스베덴보리가 룬드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현실로 한 해결안이 왕께 제출되었다. 그는 웁살라의 낡아빠진 옛 글 묶음(문서철)에서, 200년 전에 링케핑크가 쓴 편지 한 통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스웨덴의 큰 호수인 벤네르와 벳테르를 지나 서쪽 대양과 발틱 해를 잇는 물길의 가능성 문제를 내놓고 있었다.

 

 

왕은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참말로 앞 세기에 그 줄을 따라서 일은 시작됐지만 도로루헤단 큰 폭포를 만나서 그 일은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포르헴과 스베덴보리는 그 어려움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계획은 바로 도로르헤단 강 하류의 얼마쯤은 좁아지고 또 양측과 강바닥에는 험한 낭떠러지가 있어서, 물문과 둑을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포보다도 어려운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여 제 돈을 들여 그 일부 공사에 매달려서, 1718년 [30세] 여름, 스베덴보리는 그 공사본부인 벤넬 호수 남쪽 벤넬보리에 머물러 있었다.

 

『굉장한 큰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벤세리우스에게 썼다.

 

 

『생각은 복잡한 반면에 비용은 적게 듭니다……. 일은 모두 나무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의 삯은 하루 3다레루였다. (스타르보 1718년 2월, 벤넬보리 1718년 [30세] 6월).

 

의관(議官) 포르헴은 가족과 함께 벤넬보리로 옮겨왔고, 그의 두 젊은 딸은 어김없이 왕에게 소개되었다. 왕은 운하의 일을 보려고 짬을 내서 들린 것이다. 『우리들에 대한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근처에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고 스베덴보리는 썼다. 『특히 왕이 여기에 온 그 순간에, 우리들은 도로루 헤단 폭포의 낙하를 멈추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기술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신뢰를 품고 있습니다.』 (벤넬보리,1718년 [30세] 6월).

 

 

스베덴보리는 당시 출판된 최근의 것을 직접 왕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것은 날도(경도)에 관한 논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대수(代數)』였는데, 이것은 스웨덴 말로 씌어진, 이 얼안의 것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왕의 책상위에 놓았다. 왕은 앉아서 잠시 동안 그것들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왕은 나중에는 아주 은근한 태도를 보였다. 8월 29일, 해가림(일식)이 일어났을 때에,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관찰하기 위하여 왕을 밖으로 모셨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과학을 향상시키기 위하여서 많은 것을 얻기를 바랐지만, 천문학의 관찰이라는 『신기한 것』을 키워낼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9월에, 왕은 다시 벤넬보리를 방문하였으며, 이 젊은 감사관을 전보다 더 좋아 하였다. 그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 대단히 중요하고 기술적으로 아슬아슬한 재주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추위로 호수와 늪과 강이 얼어붙어 다닐 수 없게 되자마자, 찰스 왕은 군의 선두에 서서 남쪽 노르웨이로 진군했다.

 

길은, 좁은 골짜기를 지나고, 험한 벼랑으로 둘러싸이고, 높은 산봉우리를 지나고 있었다. 꼭대기에 다다르니, 맞은편에는 이데휘올드의 골짜기를 따라서 적군이 다 꺼져가는 화톳불 둘레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무장된 스웨덴의 익수(베테랑)로 이루어진 대군을 맞바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여 중요길목(요새)으로 물러선 것이었다. 며칠 만에 스웨덴은 후레데릭크스하르를 빼고, 온 지역을 지배했다. 후레데릭크스하르는, 곶에 독수리둥지처럼 쌓아올린 난공불락의 중요길목(요새)이었다.

 

찰스왕은 이 중요길목을 포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덴마크의 선대가 좁은 만(협만)의 들목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에서 군대에 식량과 탄약을 나르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뎃켈 장군은, 스트렘스탓드에게 이데휘올드까지 15마일이나 되는 것을, 뭍길로 작은 배를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왕이 자기에게도 전함이 필요하다고 결의하여, 브린간틴*1)을 두꺼운 판자에 태워서 나르고 져 했는데, 이러한 아슬아슬한 재주는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500명이 달려 붙었으나 무거운 갈리선(船)을 *2)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7월에, 뎃켈 장군은 사관을 포르헴에게 보내서 그 배를 움직일 가장 좋은 방법을 상담하게 하였다. 한주일이 지나서 포르헴은감사관 스베덴보리를 보내서 그 일을 맡게 하였다.

 

뎃켈 장군은 최고 통수부에 보고 하였다. 『감사관과 달헤임 대령은 분주하게 그 일을 하고 있으며, 나는 그 진행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다시금 300명 더 늘려서, 다른 길을 지나서 그 큰 배를 좁은 만으로 나르는데 7주간이 걸렸다. 그 감사관은 로라 밑에 떡갈나무 판자를 깔고, 그 위에 이 배와 다른 배 네 척을 끌어내는 것으로써 9월 6일에 다 하였다. 스베덴보리가 벤세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아슬아슬한 재주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로 여겨진다.

 

*1) 브린간틴은 앞뒤로 돛대가 둘인 돛배

*2)갈리선은 중세기 때에 주로 지중해에서 다닌 돛과 많은 노를 가진 낱뱃마루(單甲板)인 대형선(大型), 주로 노예나 죄인들에게 노를 젓게 하였다.

 

 

이 대립되는 두 선단사이에 여러 번 붙어 싸움(교전)이 있었으며, 드디어 덴마크는 항복하고, 그 배를 가라앉히고, 스웨덴에 그 좁은 만의 지배를 맡김으로서 중요길목(요새)공격의 발판을 삼게 하였다. 『기사(技師)로서의 스베덴보리』의 책을 쓴 베르그렌은 그 정경을 상상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험한 꼭대기가 전나무로 덮인 북국 보흐스렌의 거친 산길을 넘어서 기묘한 행렬이 잇는다. 아주 큰 배의 몸체가 수백 명의 수병과 병사에게 끌려서 험한 비탈길을 오르고, 좁은 골짜기를 지나고, 나무 숲 뒤를, 늪지대를 건너간다. 여기에는 가냘픈 찰스 12세의 모습이, 거기에는 뎃켈장군이, 거기에는 다르헤임이. 또 다른 많은 상처 입고 험상궂은 눈초리를 한 가로리니아 사람이, 세모난 모자를 쓰고, 구두를 신고, 금으로 된 옷깃의, 눈 익은 푸른 색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가운데, 이 빛깔이 넘치는 정경의 한복판에 전쟁이 기념장은 없으나, 눈에 천재의 불꽃을 간직한 꾸밈없는 평복 차림의 한 젊은이가 움직이고 있다. 그야말로 이 모든 일을 뒤에서 밀어내는 원동력인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이다. 밤을 새며, 때로는 화톳불 곁에, 때로는 네슨에 제사(祭司)의 집에서 쉬면서 이 행렬은 나아간다. 마침내 갈리선이 맑고 푸른 물인 이데휘올드에 미끄러 들자, 스웨덴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고, 덴마크 사람들은 거포(巨砲)의 불을 끼얹고, 이에 헤레스마르크의 포열(砲)은 반례(返礼)를 끼얹는다! 그 모든 일의 끝에는 무엇이 남느냐, 공문서 몇 장의 종잇조각과 사람들의 입에 오른 막연한 전설 뿐.』

 

오늘날에도 한 줄로 늘어선 짧은 통나무가 이끼 속에 파묻혀서, 200년도 더 옛날에 갈리선을 끌고 간 흔적을 말해 주고 있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아직 그 늪지대를 보흐스렌의 『갈리 늪』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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