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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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요텐부르이의 이단재판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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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텐 부르이의 이단 재판

 

 

스베덴보리가 1769년[81세] 가을에 스톡홀름에 닿았을 때에는 - 그는 하트레이에게 쓴 대로 - 자기는 그 이름난 벗이나 친척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리라고 바란 덧은 옳은 생각이었다는 생각에, 그 영국 친구가 염려한 족쳐 해침이 몸에 내리 덮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 - 훗날의 구스타브스 3세 -에게서 회식에 청함을 받고서, 황태자와 그 황태자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에는 약간의 상원의원과 회식하고ㅡ 교직원의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국회에 참석한 모든 감독은, 한 사람의 예외는 있었지만, 몸소 그를 맞았다, 고 베이엘 박사에게 써서 부쳤다(스톡홀름, 1769년[81세] 10월 3일).

 

 

그러나 벌써, 요텐부르이 교회 회의에서는, 대학의 교사 몇 사람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바른지 아닌지를 지나서, 다시 새로운 생각을 발표하는 권리의 맞고 안 맞음에 관하여, 전반적으로는 종교문제에서, 자유의 권리 그것의 맞고 안 맞음을 둘러싸고, 힘든 이론 다툼이 터지고 있었다.

 

람베르이 감독과 수석사제 에케봄은, 전에는 스베덴보리에게 의좋은 편이었으나, 지금은 베이엘 박사와 로센에 대한 앙심을 들어내서, 종교의 사상 그것의 맞고 안 맞음 보다도, 자유로운 생각의 권리에 대한 맞고 안 맞음이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 새로운 생각이 교회 회의에서 제정한 믿음 조목에 맞서는 성서의 뜻풀이 문제에만 한정되어 있을 때에는, 신학부 교수들 중에서 아주 많이는, 특히 강사 렘프케와 요테뉴스는 거기에 흥미를 보여, 앞엣 사람은,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적잖게 받아들인 논문을 교회 회의에서 발표하고, 뒤엣 사람은, 베이엘 박사가 그 도발적인 설교 집을 내는데 거들기 까지 하였다.

 

그 때까지 스베덴보리가 지은 책은, 다만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학자들만이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로센이 「계시에 의한 계시록 풀이」의 책평을 일반에게 내고, 베이엘이 스웨덴말로 「가정설교 모음」을 낸 뒤에는 형편이 확 달라졌다. 종교의 새로운 생각이 쉬운 말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딴길(이단)이, 일반 사람의 가정에 파고들기 전에, 그것을 송두리 째로 제쳐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인가된 가르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양무리들은 뒤집히고, 양치기들은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이것이 에릴 람 베르이의 생각이요 - 그는, 적바림(기록)에 따르면, 그 교회 구역에서 별로 존경을 못 받고, 몸도 허약한, 좀 허영꾼 같은 사내로 적혀 있는데 - 또 그것은, 오로gm 에케봄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이 감독은 인기는 있지만, 성질이 급한 사내이며, 새 교회를 거스리는 원수의 우두머리이며, 교회 회의라는 큰 가맛 속에서 빚어내는 마녀가 좋아하는 뜨거운 국 알맹이의 임자 이었던 자라고 되어 있다. 『이 감독님들은 저 자신을 알 필요가 있다』고, 요테뉴스는 적었다. 『이 사내는 우리들에게서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을 그 교회의 예배하는 자로 불러 모으고……. 아주 얕은(천박한)사내요, 그가 전문으로 연구하는 과목에서 조차 아는 것이 없다.』

 

 

1768년[80세] 9월 2일, 페테르 아우레뉴스 라는 시골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가르침 책에 걸리는 가르침을 담은 책을 퍼뜨리는 것을 멈추는, 아주 가열한 방법을 쓰도록 교회 회의에 힘을 끼쳤다.

 

10월 12일, 이것도 또 시골 목사인 안델스 코리뉴스가, 스베덴보리의 책은 어디까지 물리쳐야 하는 지를 밝혀 달라고 감독에게 원하였다. 거기에는 단지 죄가 없는 신학에 관한 것이 담긴 것뿐인가, 아니면 그것은 사실로 딴길(이단)인가. 만약 딴길 이라면,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런 종교의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번지게 하는 것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교회 회의는 능갈맞게도 약삭빨리, 베이엘 박사에게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까 보고서를 내라고 하였다. 그는 그대로 하기는 했지만, 다음 해 2월이 될 때까지 내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스베덴보리는 사람 복이 있는 시민, 학문세계에서 큰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더할 나위 없이 존중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종교문제를 철저하게 낱낱이 검사도 않고, 성급히 옳지 않다고 보아서, 책망하거나 들추어내고 공격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 그래서 그것을 물리쳐야 할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요한복음 7장 17절).

 

 

으뜸자리 사제인 에케봄은 - 그는 람베르이 감독이 국회에 나가서 없는 동안은 의장의 일을 보았다 - 그 한 달 뒤에, 매우 세게 생각을 말했다. 『나는 감사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종교의 가르침은 잘 모르며, 또 그것을 알기 위해서 수고를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해 밝혔다. 『그러나 이 지은이와 말해보고, 또 그 『계시록에 의한 계시록 풀이』를 살펴보고……. 그 가르침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딴길 이오, 해롭고, 가장 높은 정도로 물리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고백해야만 하겠습니다.』그는, 감독이 회의의 명령을 바탕으로, 곧 열릴 국회의 교직원에 이 일을 알리자는 안을 냈다. 교직원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번져 퍼지는 것을 막는데 필요한 방법을 취하겠지.

 

베이엘은 교회회의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검사하지도 않고, 그 제안을 가결하는 것을 세게 반대하고, 이 일은 임금님에게 곧 바로 내자고 제안하였다.

임금님은 어떤 방법을 써야할 지를 정하겠죠. 로센 박사도, 스베덴보리가 지은 책을 넉넉하게 연구하지도 않고 성급히 손쓰는 데는 반대 하였다.

 

 

 

에케봄이 한 일은, 스베덴보리가 암스테르담에 있을 때에 그에게 알려왔다(242쪽을 보라). 그는 매우 성내어, 베이엘 박사에게 곧 편지를 썼고, 그 비난에 대답할 글을 같이 넣어서, 그 편지를 일반에게 알리도록 제안하고, 그 으뜸자리 사제가 그 비난을 걷어 들이지 않으면, 그를 범죄소송에 걸겠다고 썼다. 그는 으뜸자리 사제가, 자기는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지도 않으며,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넉넉히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도, 이 가르침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딴길 이오, 해로운 것이어서』티끌만큼도 용서할 수 없는 뿌리부터 잘못으로 꽉차있다고 언명한 것에, 그를 비난하고, 에케봄이, 그 가르침은 소쯔니우스 설* 이라고 말해 밝힌 것을 『저주 받을 욕되게 함(모독)과 거짓』이라고 하여 고발하는데, 왜냐하면, 소쯔니우스 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됨을 아니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소쯔니우스 설이란 말을, 까놓은 모욕과 악마 같은 조롱이라고 생각합니다……. 으뜸자리 사제의 생각은,(계시록의)용이 입에서 토해내서 여자를 빠져 죽게 하려고 했던 홍수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암스테르담, 1769년[81세]4 월 15일).

 

 

바야흐로 요텐부르이 종교회의 의원들은 두 갈래로 갈라져, 한쪽은 이른바 정통파의 가르침에 터무니없는 열렬한 마음을 보이고, 다른 쪽은 못살게 굶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불안했다. 헤아리기 어려운 고소인인 저 시골목사 페테르 아우레류스의 아들인 감사관이오, 변호사이기도 한 안델스 아우렐은, 미워함으로 불타서 에케봄에 부추기어서, 나중엔 베이엘 박사가 가르친 학생의 공책을 딴길의 증명으로 내 놓고, 교회회의에 앞서 학생들을 불러서, 스승에 대하여 증거말 하라고 하였다.

 

* 소쯔니우스 설~ 소쯔니우스(1539~1604).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또 보통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이다.」고 하는 것이, 그 가르침의 중심, 유니테리안 파의 신학자.

 

 

람베르이와 에케봄을 우두머리라고 한다면, 그 특별한 아우렐은 같은 굴의 졸개였다. 『저와 뜻을 같이하는 자에게는 정나미가 좋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그가 누구이든 대든다는 사내였다.』그는 기독교의 참 이치를 옹호한다는 것보다, 싸움꾼 같은 절개와 지조가 없는 사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교회와 가르침의 순수함을 찾기 위한 열렬한 맘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은 조심성도 모르는 엉터리 변호사라고 도장 찍혔다.

 

그가 잡혀있는 생각의 한 이유는, 그가 베이엘 박사에게 개인적으로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능갈맞게도, 약삭빠르게 적으로서 맞서는 자이며, 다른 사람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달콤한 말을 부렸다. 요테뉴스는 쓰기를 『나를 대하는 그의 사랑은 전혀 눈먼 것 같고, 여기 내 일벗 앞에서, 나를 학문 쪽에서는 겨눌 자가 없다고 높이 칭찬할 만큼이었는데, 그 단 하나의 까닭은, 그의 생각으로는 다른 아주 많은 사람은 그 재능을 자랑삼아 보이는데, 나는 그런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테뉴스는 일의 참모습을 뚜렷하게 하려는 나머지, 스톡홀름의 한 기자에게, 베이엘 박사를 족쳐 해치는 숨은 원인을 밝히고 있다. 『박사이기도 한 크린 목사의 열렬한 마음은, 베이엘 박사를 일터에서 내 쫒는데 있는데, 그 뜻은, 그는 지금은 나이 많은 철학 강사이지만, 나중에는 신학의 교수직을 얻는데 꼭 있어야 할 대성당에 딸린 사제의 신분을 꼭 마련하는 것입니다.』크린은, 이 고발에서는 대성당 으뜸자리 사제인 에케봄의 오른팔이라고 되어 있다.

 

가브리엘 안델슨 베이엘 박사는 이때에 50줄이었고, 25년 동안 대학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 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이론 다툼은, 그에게 다른 어려운 사정이 더하여서,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참 이치를 위해서 싸워야 할 때가 오는 것을 보자, 용감하고 또 굽히지 않았지만, 몸은 튼튼하지 못하고, 그의 말로는 『열은 지닌 가슴 쪽의 질환으로 쇠약하였다.』그는, 어느 역사가의 말로는, 앞서 아우렐과 소송하는 일로 맞섰기 때문에, 이 엉터리 변호사를 마음 속 깊이 박힌 원수로 삼는데 이르렀다.

 

 

1769년[81세] 가을, 베이엘의 아내는 그에게 아이 다섯을 남기고 죽었다. 그 여자의 죽음에는, 그의 남편에게 견디기 힘든 깊은 상처가 따랐다. 아내는 두 사람이 그때까지 참된 것이라고 마음에 간직했던 새 가르침을 죽으면서 버렸다. 그 남편은 그 일을 스베덴보리에게 편지를 보내서 알렸다. 그는 답장에서 그 여자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한 것은, 그 죽음의 자리에 목사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으뜸자리 사제 에케봄 그 자였던 것을 설명하였다.

 

『당신이 죽어가는 아내를 말하는 것은, 특히 목사 두 사람의 인상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여자의 생각을 저들의 영들과 묶고, 그 영들에게서 그 여자는 그 때에 말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죽어갈 때, 영의 상태에 있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 여자를 거쳐서 처음에 말한 영들은, 하늘에서 쫓겨난 용을 따른 패거리에 붙습니다.(요한 계시록 12장 참조). 그들은 내쫓겼을 때에, 구원 하시는 주님에 대한 미움으로 차고 넘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을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의 영의 기운이 하늘나라에서 그들에게 내려오면, 그들은 미쳐서, 계시록 6장 16절 말씀대로 굴과 산에 있는 바위들 틈에 숨어서, 저 자신을 살리려고 합니다. 죽은 당신의 아내는, 어제 나와 함께 있어서, 남편인 당신에게 말하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한 많은 일과, 또 그 여자를 거기에 빠지게 한 자들과 말한 것을, 내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당신 가까이에 있다면, 이 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쓰도록 허락되지는 않았습니다…….』(스톡홀름, 1769년[81세] 10월 30일).

 

 

베이엘 박사가, 스베덴보리의 제안에 따라서 그 편지를 인쇄에 붙였을 때에, 족쳐 해침(박해)은 꼭대기에 이르렀다. 교회회의는 미쳐 날뛰었다. 그들은 인쇄인을 불러서 막말로 욕을 퍼부었다. 그들은 베이엘과 로센을 그 자리에서 내 쫓는다고 서슬이 대단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1769년[81세] 가을, 스웨덴에 뭍오름(상륙)하였을 때의 속 형편(정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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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국회는 서울이 아닌 바닷가에 있는 놀케핀에서 열렸다. 스베덴보리의 모습은, 귀족원에서 찾아보기란 드문 일이었으나, 교직원에는 모습을 보이고, 토론에도 끼었다. 그는 「혼인사랑」의 책 50부를 런던에서 보내게 하여서, 그것을 국회에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책이 뺏어 거두어진 것을 알고, 그 일을 여러 감독에게 다져 물었다. 그들 가운데 모두는, 저희들은, 그 일을 다만 그 책이 흩어져 없어질까 해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맡아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일은 교직원 의장인 휘레니우스 감독이 발표한 것이었다. 그 일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새겨 의논함(토의)이 없었고, 의사록에도 무엇하나 적바림(기록) 된 것이 없어서, 교직원은 그 책을 잡아 두는데 는 조금도 끼친 것이 없었다.

 

 

스베덴보리는 단 한 사람의 예외를 빼고서는, 감독들은 모두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고 하였는데, 그 한사람이란 휘레니우스 감독이오, 그는 스베덴보리 하고는, 스베덴보리의 누나인 안나의 남편 벤세리우스의 막내 사위요, 친척이었다. 스베덴보리는 곧 힘 있는 친척에게 그 책을 넘겨주기를 부탁했는데, 휘레니우스는 그 바람을 들어 주겠다고 확실하게 약속했다. 그는 늙은 숙부가 방을 떠날 때, 그를 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는 교직원에 가서, 가장 억세게 그 책은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꾀를 부려서』교직원 의원의 반 넘은 수를 얻었다고 말한다. 스베덴보리가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되자, 그는 이 감독을 매우 깔보고, 예수를 입맞춤으로 팔아넘긴 가룟유다에 비겼다. 솔직하게 물리친 쪽이, 믿다가 배반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그 일을 휘레니우스에게 끌어내서, 그의 책을 풀어주기를 구하는 청원서를 10월 6일에, 국회에 냈다. 그러나 다시, 그 감독은 넘겨주기를 물리치고, 스베덴보리가 「혼인사랑」은 신학책이 아니고, 그 거지반은 도덕을 다룬 책이라고 주장함에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스베덴보리가 참된 영의 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단 한 사람의 친척은, 그의 여동생 헤드뷕과 광산국의 일벗인 랄스 벤셀쉐르나의 아들 랄스 벤셀쉐르나 감독이었다. 랄스 감독은, 언제나 큰 아버지에게는 좋은 뜻을 보이고, 스베덴보리는 그를 아주 존경하였다. 그는 「손쉬운 풀이」를 그 감독과 폰 헤프켄 백작에게 부치고, 그것들을 다른 누구에게도 빌려주지 말라고 엄하게 다짐했다. 왜냐하면, 『신학은, 지금 겨울철 경기가 나쁜 형편에 있고, 이 북쪽 나라에서는 밤은 남쪽 지방보다는 길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 교회 안에서 이해되기도 하고, 지혜에서도 끄덕이게 되는 모든 것을, 걷어차기 때문입니다』고 말한다. 그 같은 편지에서 그는, 헤프켄 백작에게 쓰기를 『「손쉬운 풀이」는 당신이 짐작한대로, 앙심을 가진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람이 그때까지 받아들인 잘못된 원리 때문에, 깜깜한 데 놓인 처음 때뿐입니다. 신학 문제에서도 이치에 맞는 것은 그 속에 갖기 때문에, 그것은 천천히 인정되고 승인될 것입니다. 그 일은 외국의 여러 곳에서 실지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달라짐이 이미 스톡홀름에서 일고 있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벤셀쉐르나 감독에게는 한권만 부치고, 그것을 아무에게도 결코 빌려주면 안 된다고 엄히 명했습니다. 벤셀쉐르나는, 신학 문제에서도 합리적이어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믿음에 대한 복종에서 받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당신이, 내가 지은 책을 즐긴다는 것은, 내게는 기쁨입니다.…….』(스톡홀름 1769년 [81세] 11월 17일.

 

 

벌써 일은. 새로운 생각이 문제가 아니고, 지식이 믿음의 일에 힘을 끼칠 수가 있는가, 없는가, 한번 굳힌 생각은 지배권을 얻어 영원히 가장 높은 것으로서, 흩어짐도 없이, 맨 위에 앉아야만 하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 평행에서, 이른 때부터 내세워졌고 사실 1734년[46세]에 「한없는 이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쓴 그의 작품은, 종교에서 생각하는 자유를 구하여, 대담하게 내디딘 한 걸음이었다. 여기에서도 또 그는 그 시대에 앞장섰고, 프랑스 철학자들을 여러 해나 앞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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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 일, 람베르이 감독은 스톡홀름에서, 요텐부르이 교회회의 앞으로, 저는 스베덴보리에 관한 사건을 교회 위원에 내놓았으므로, 머지않아 그것은 온 교직원에서 새겨의논(토의)됩니다, 고 써 부쳤다. 당국의 쇠방망이가, 새롭고 이상한 것을 신학에 끌어들이려는 원망이나 불평하는 패거리에게, 내려치리라.『이제부터는, 교사라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을 옹호하거나, 또는 다른 이에게 펴는 일은 유리한 계책이 아닙니다.』

고 그는 말했다. 스베덴보리의 『괴상한 편지』를 인쇄해서, 뒤집어쓴 치욕은, 말로 할 수 없다. 『인쇄기를 다루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패거리의 막놀아난 정신을 막는 처지를 취하게 됩니다. 나는 이 암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있는껏 미리 막기법을 취할 생각입니다』고 그는 아우렐 에게 개인으로 썼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체계는 『적잖게 모하멧 교의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그 때에 누구를 모하멧 교(회회교)에 물들었다고 고소하는 일은, 가장 큰 창피를 입히는 것이었다.

 

스베덴보리는 많은 글 평에서, 모하멧 교라고 벼랑에 내밀었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혼인의 기쁨이 넘치는 낙원이라고 적힌 것에서 일어났다.

 

 

겁 없는 고소인 아우렐은, 저 스페인에서 최초의 종교 재판소장 토귀마다의 매서운 정신을 드러냄으로서, 휘레니우스에게 돌 하나도 뒤집지 않은 채로 버려두면 안 된다고 부추겼다.

 

『나는 당신에게, 이 스베덴보리의 진기한 생각을,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진짜 딴길(이단)을 숨 막히게 하고, 벌하고, 끝까지 뿌리 뽑기 위하여, 가장 과감하게 손 쓸 것을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를 짓이기는 곰과 들 짐승은 힘센 손으로 내 쫓을 수 있겠죠.』곰은, 어쩌면 마음씨가 고운 스베덴보리이고, 들짐승은 베이엘 박사이었다.

 

『예수가 피와 죽음으로써 죄무름(속죄)한 사람들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 데서 살려내기 위하여, 모든 기독교적인 심중하고 가열한 방법을 쓰게 되니까 안심 하십시오…….』하고 휘레니우스는 믿음 깊은 말을 하여, 교직원이 스베덴보리의 『정신착란』에 놀라고 있는 것을 적고 있다.

 

 

요텐부르이에서 에케봄은, 주먹을 휘두르면서 잘못된 강사들을 위협하고, 욕을 퍼부었다. 그는 그들이 그 자리에서 내쫓기고, 그 소송심리 중에는, 모든 활동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까지 서슬이 대단했다. 로센은 견디다 못해,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는 스웨덴에는 없다고 힘찬 말로 상기 시켰다. 베이엘은, 그 편지가 공간 된 데서 생긴 법석에 놀라고, 스베덴보리에게 어떤 일이 내리 덮일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저 자신의 일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가 그 폭풍을 저 옛날 바이킹 처럼 즐기기 조차 했다고 까지 생각하였다.

 

『이러한 법석은 아무 위해를 더하지 못합니다.』고 그는 썼다. 『왜냐하면, 그것은 포도주를 담글 때에 띄우는 일 같고, 포도주는 그 일로서 불순한 것에서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이 공기에 닿아서 없애지지 않고서는, 올바른 것이 인정되고, 채용되는 일은 없습니다.』…….『나는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에게서, 「당신은 밤에 팔베개를 베고 마음 편히 쉬세요.」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일로, 세상이 지금은 교회의 일에서는 깜깜한 밤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스톡홀름, 1769년[81세]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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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로, 스베덴보리에게 위험한 재해를 주고자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 로프삼이 넉넉한 터무니에 기초하여 말한 이야기 속에 보인다. 『교직원의 어떤 위원들에 의하여 능갈맞은 계략이 세워졌다. 그것은 스베덴보리를 법정에 불러와서 심의를 한 후에, 그를 종교의 생각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이런 자를 자유로이 놔두는 것은 극히 위험하고, 그래서 정신병원에 잡아 가둔다는 것이었다. 스베덴보리의 친구인 어느 상원 의원이 이 일을 듣자, 곧 감사관에게 그 계획을 알리고, 나라를 떠나라고 권하였다. 이 일로 스베덴보리는 너무나 슬퍼서, 곧 뜰로 나가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며,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고 주님께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위로에 넘친 꼭 믿음(확신)을 받았는데, 그것은 「늘 그랬듯이, 어떤 화도 네 몸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네 원수는 네가 한 집안의 어른이오, 귀족원뿐만 아니라 교직원의 힘 있는 집안사람과 인척관계인 것을 생각할 때, 그 족쳐 해침(박해)을 굳이 실행에 옮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로프삼은 이 이야기를 하고나서, 그 「회상기」를 읽는 이에게, 내가 적은 일은 그 잔 조목까지 모두다 진짜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다른 이는 이것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그 국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에, 스베덴보리가 몸이 위험하게 되어, 그가 부리는 사람에게 누구도 집에 들이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말한 일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젊은 사내 한 사람이 스베덴보리를 몰래 죽이려고 그의 저택에 왔다. 가정부가, 주인마님께서 안 계신다고 그 사내에게 말하니까, 그는 그 말을 믿으려 고는 하지 않고, 주인을 찾기 위하여 뜰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지키는 방법을 마련해 두셨다. 그 젊은이가 뜰에 뛰어 들려고 할 때, 그 외투가 문 자물쇠 못에 걸려서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맨 칼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매우 당황하며, 들켰다고 생각하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말로 전해져 오는 것인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주간의 중간쯤에 정원을 맡은 사람과 그의 아내가 나들이옷을 입고, 글방에 있는 스베덴보리 앞에 나타났다. 정원 맡은 이는 모자를 비틀어 굽히고, 가정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스베덴보리가 묻자, 뷋셀은, 저희들은 그만두고 싶습니다, 고 말을 하였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충실히 일하고 나서, 갑자기 제 곁을 떠나고 싶다는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매우 놀랐다. 『당신께서 올바른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제 더 당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모두 말합니다.』고 마리아는 말했다. 『당신께서는 한 번도 교회에 가시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을 성마리아 교회에 나가신 일이 없으십니다.』

 

『당신들은, 교회를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것이, 뾰족한 탑과 구리로 된 지붕이라고 믿습니까?』하고 스베덴보리는 대답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갖지 못한 자에게는 거룩한 것입니까? 교회의 거룩함을 만드는 것은 벽과 풍금과 강단 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마님!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하고 마리아는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 방안에, 또는 정원에, 또는 어디든, 모든 착한 것을 내려주시는 분에게 기도를 드리는 곳에, 그분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여기에도 교회가 있습니다.』

 

그 두 충실한 부림꾼은 스베덴보리가 믿음의 한 가운데 있는 알맹이는 인자(仁慈)이며, 곁꾼(외형)인 경건은 그 껍질이라고 정성을 기울여 말하고 있는 동안에 머리가 수그려졌다.

 

『당신들』하고 그는 말을 끊었다가 『당신들이, 당신들의 눈으로 날마다, 나를 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내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당신들 스스로 정하여 주세요. 당신들의 판단에 맡기지요. 바르게 생각되는 대로 하세요.』

 

그 다음날, 그들은 다시 그의 앞에 섰는데, 보통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어떤 생각이 나왔습니까, 물었다.『아! 감사관님. 』하고 부부는 말했다. 『우리들은 주님이 명하신 것과 맞지 않는 말씀이 또는 행함이 하나라도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하나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그리하여 주었으면, 또 그렇게 바라고 있습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했다. 『그래서 당신들은 앞으로도 내 곁에 있겠습니까?』『예! 마님』

(『우리들의 감사관께서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만에 하나라도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신 것이 틀림없습니다.』고 늙은 부인은 몇 년이 지나서, 이 이야기를 다 마쳤을 때에 덧 붙였다.』)

 

 

*******************

 

 

1월 2일, 왕립평의회는, 미리 요텐부르이 딴길 사건에 제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교회 회의 의원 모두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잘못된 데 관하여, 또 그것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썼는지를 임금님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정을 손수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가르침의 순수함과 걸리는 것을 무엇이든 담고 있는, 스베덴보리가 지은 책을 평하거나, 번역하거나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받았다. 이 칙령을 실행하면서, 에케봄 주임사제는 그 칙령보다도 더 한 걸음 벗어나서, 그 교직에게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억압하도록 경고하고, 그것을 딴길 이라고 몰아세우기는 했지만, 칙령에는 그 의미의 것은 조금도 담지 않았다.

 

 

베이엘과 로센도, 다른 모든 사람처럼 스베덴보리의 지은 책에 관하여, 그 생각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위협과 공갈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으로 그 생각을 말하였다. 로센 박사의 짧지만, 그러나 활기가 넘치는 선언은, 거의 성서의 말씀을 영리하게 따온 데서 이루어졌다. 『이제 와서는, 예언자는 있을 수 없습니까,』『이제 와서는, 주님은 환상을 주시지 않습니까.』하고, 그는 묻고 『만일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를 물리치고, 그 환상을 없애버려야 합니다…….그래도 나는 스데반이 「붙잡히었고」, 하늘나라가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 , 사도행전7장 56절**).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환상과 영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리스 사람에게는 미련한 자였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미련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까(고린도 전서 1장 23절*** ).......만일 영들, 또는 천사들이 스베덴보리와 이야기를 한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벋섬(반항)하여 싸울 마음이 안되고, 또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은 사람을 저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사도행전 23장 9절 ****).』

 

 

* 요한복음1 : 5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 사도행전 7:56 그리하여 그는 “보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 고린도전서 1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지만.

 

**** 사도행전 23: 9 그래서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파 사람 편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바울을 편들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해 주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선포하여,(옮긴이 주)

 

 

베이엘 박사의 선언은 넉넉하고, 다듬어지고, 그리고도 가지런한 것인데, 그 내용의 극히 일부를 소개하는데 그치자,『순수한 참이치는 조용한 마음의 형편을 요구하고, 혼란한 가운데서는 성해지지를 못합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면, 그것을 뒤집지는 못합니다.』

『성서는 하나 밖에 없는 심판관이고, 규정이오,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 가르침은 주의해서 조사되고, 꼲음(판정)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는 또 순수한 믿음을 고백한 데에 맞서지 않는 종교의 모든 일거리에서의 자유를 스웨덴에 포고한 임금님의 칙령을 따왔다.

 

『그런고로 가르침은, 그것이 말씀에서 내림(유래)할 때에는 순결하며, 또 고백은, 그러한 가르침과 꼭 같을 때에는 순수합니다.』

 

 

이후에 베이엘 박사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과 맞서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특별한 책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대학과 도서관에, 또 유럽주의 나라들 거지반의 학문을 쌓은 것이 풍부한 분들에게 퍼지고 나서, 지금은 20년이 더 지났지만, 내가 알기로는, 지금껏 하나라도 올바른 되침(반박)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베덴보리가 지은 책이 두드러진 통일성과 수리적인 논리성을 말하고, 그가 지은 모든 책은 생활을 바로 잡는데 도움을 주어서, 하늘나라 삶에 알맞은 사람이 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사도신경과 아주 꼭 맞고, 「성서는 성서로 풀지아니하면 안 된다」고 하는 법매김(규정)에 터하고 있다고 논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몽땅 성서에서 끌어냈고, 또 모아졌고, 글자 뜻에 의하여 다짐되어 있다.

 

 

『하나님의 빛이, 그가 바라시는 대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감히 막을 자가 있을까요』하고, 그는 묻고, 『누구든지 그 진리를 찾아 구하여 확실한 데 이르고 싶어 간절히 바라는 이는, 이 책을, 그 스스로를 위하여 배워야만 합니다.』베이엘 박사는, 원수, 미워 하는 자, 헐뜯는 자에게서 감싸 주기를 왕에게 하소연하면서, 대학에서 제가 오랜 동안 충실하게 맡은 일을 다 한 것과 또 어미를 잃은 다섯 사람의 어린 아이들 일을 말하며, 무엇이든 왕이 가르치도록, 또 가르치지 않도록 명한 것은, 존경하고 또 그것을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시대는 베이엘에게 매우 가혹하였다. 그가 신학을 강의 하는 동안에도 폭동에 가까운 일이 교실에서 일어나고, 학생들은 ……. 온통 질서가 없음을 나타내어……. 아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마룻바닥을 쿵쿵거리며 큰 소리를 치고, 그래서 질서를 존중하는 학생들은 스승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하소연 하였다.

 

그 두 박사 곧 로센 박사와 베이엘 박사는, 그 직분을 빼앗기고 나라 밖으로 내 쫓긴다는 보고가 스베덴보리에게 이르렀다. 그는 놀라며,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진짜 문제가 되는 데를 곧 『죄 씻는 자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곧바로 가까이 가는 것이 허락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공로가 넘겨씌워지기 위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만 하는가.』 라는 논할 데(논점)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그는 베이엘 박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다시금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또 스웨덴의 찬송가를 따와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며, 이에 곧바로 가까이 가는 것을 명하였다고 증거대어 밝혔다.

 

 

낮도 밤도 없이 나는 평안하게

예수님 가슴에 안기어 쉬노니

예수님만 나는 의지 하노라.

 

 

『그들은 이 가르침을 「스베덴보리 주의」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순수한 그리스도 교」라고 부릅니다.……. 만일 당신이 해임되어 나라 밖으로 쫓겨나게 되면, 앞날에만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은, 그 일은 당신이 우리들의 주님, 구주에게 곧바로 가까이 갔다는 단지 그 까닭으로 당신에게 일어났다고 밖에 말하지 못합니다.』(스톡홀름,1770년[82세]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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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평의원이 1770년 [82세] 4월 26일에 그 법령을 공포하였을 때, 그것은 극히 가혹한 것이었다. 평의원은 여러 가지 언명된 보고문을 생각해 본 후에 『스베덴보리가 지은책 속에 들어 있는 신학의 가르침을 온통 옳지 않다고 하여 물리치고 막았다.』그러기 위해서 베이엘 박사와 로센 박사는 죄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믿음의 제 1세기에서 오늘날까지 그리스도 교회에 일어난 수많은 교파 가운데서, 성서에 바탕하지 않은 것은 거의 하나도 없다.』 때문에, 이 새 가르침은 성서에 꼭 맞는다는 두 박사의 논설 요지를 평의원은 밀어젖혔다. 가르침은 아우구스부르그 믿음 고백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어떠한 혼자의 좋아함에도 바탕을 두어져서는 안 된다고, 평의원은 내 세웠다, 그러나 그 피고들에게 더 엄한 처치를 취하기 전에 그들을 주의 시키고 뉘우쳐 고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그들은 신학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또 스웨덴 나라에 들어오는 스베덴보리의 책은, 모두 다 뺏어 거두고 나라 밖에서 들어오는 책은 가장 가까운 교회 회의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세관은 넘겨주면 안 된다는 것도 요구했다. 이 왕의 칙령이 5월 5일에, 요텐부르이 교회 회의에서 읽혀졌을 때, 람베르이 감독은 베이엘 박사에게, 신학과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것을 모두 그만두라 명하고, 그 일은 전부터 그 자리를 눈독들이고 있던 주임 사제 크린의 몫이 되었다. 로센 박사는 키케로와 랑케*의 강의에 스베덴보리의 교설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고 주의 시켰다. 그 두 교수는 종교를 바꾸게 하거나, 여럿이 모인 데서나, 사사로운 모임에서 도무지 그 생각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았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교를 들었을 때, 몹시 노했다. 어째서 그는 이 모두에 관해서 아무 정보를 받지 못하였나, 그의 책은 딴길 이라고 선고되고,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말로 밝혀졌다. 더구나 그 모두는, 그것에 관한 한마디 말도 알리지 않은 채로 행하여졌다. 그는 왕에게 바로 하소연 하였다.

 

 

* 랑케(BC 195~159). 로마의 희극시인

 

 

『가장 힘에 넘치고 또 은혜에도 넘치는 왕이시여, 나는 이 위험한 고비에 즈음하여, 할 수 없이 폐하의 두둔함을 바라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나는 그리스도교가 스웨덴 나라에 들어오고 나서, 더구나 여기에 자유가 굳게 세워지고 나서, 지금까지 여기에서 아무도 받은 일이 없는 처치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먼저, 일이 일어난 대로 간결하게 왕에게 아룁니다. 나는 지난날, 나라 밖에서 돌아왔을 때, 휘레니우스 감독이 「혼인사랑」이라고 이름붙인, 내가 지은 책을 뺏어 거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거리에 퍼진 소문에서 나는 내가 쓴 책을 이 나라에 아주 못 들어오게 하고, 또 그 같은 관정은, 내가 주에게서 보게 된 것은 참이 아니고, 거짓이라고 불도장을 찍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대답으로 나는 감히 그 일을 아뢰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구주가 내 앞에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시고, 나에게 내가 지금껏 해온 일을, 또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을 행하라는 명을 받고, 그 일을 위하여, 주님은 내가 천사들과 영들과 사귈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은, 내가 온 기독교 나라에 밝힌바 입니다…….또 이 나라에서는 여러 경우에, 왕이신 당신 앞에서, 특히 당신과 함께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셨을 때에, 온 왕의 집안 분들 앞에서 밝힌바 이고……. 그 때 나의 사명이 오직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이어서 또 나는 그 일을 많은 상원의원 앞에 밝혔습니다만, 본데 백작, 헤프켄 백작은 아직도 그 일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두를 사법대신은 그것이 참인제도 거짓이라고 말로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런 일은 그들에게는 생각 될 수 없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그것을 되 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 속에 나의 보임감각과 말로써, 그들이 곧이들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고도 천사들과 영들에게, 그들과 말을 하게 할 수도 없으며, 지금은 신기한 일 또한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직도 무슨 의심쩍음이 남았다면, 나는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엄숙한 맹세로써, 이것은 참이치 바로 그것이오, 또 사실 그대로이며, 거기에는 털끝만큼의 허튼 생각이 섞이지 않은 것을 증거되이 말하겠습니다. 우리 구주께서 내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영원한 복에 걸린 숭고한 목적 때문입니다……. 요텐부르이 의 베이엘과 로센에 관해서는, 나는 그들에게 다만 당신들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만을 하나님으로 삼고, 다가서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8: 18) 고만 충고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다만 그들이 그것을 승인한 것 때문에, 어느만큼 순교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일은 내가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내 책에서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텐부르이 주임사제가 그 책을 향하여 끼얹은 모두다 몹시 쓰고 매운 독한 말로 되어 있어서, 그 가운데에는 한 조각의 참이치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스톡홀름,1772년[82세]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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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83세] 12월 7일, 왕립평의원은, 피고를 지난날을 비난하지 말고, 온화하게 기독교의 사랑으로 다루도록 명하였다. 그들은 마침내는, 정부의 낯에는 아무 도움이 없는 소송사건에 지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는 참되고 유익한 것이 아주 많이 있는』것을 인정한 것이다. 소송은 드디어 남 스웨덴에 있는 에타 공소 재판소에 옮겨지고, 거기에서 3년 동안이나 더 진절머리가 나는 재판이 번거롭게 이어졌다. 이 법정은 도리어, 모든 대학의 생각을 듣기 전에는 판결을 멈춘다고 결정 하였다. 감당 못할 성가신 일은 남의 손에 넘길 뿐이었다. 웁살라 대학 교수들도 또 스베덴보리의 책은 딴길 인가, 논리적이 못되는가, 그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낸 마지막 보고를 찾아보아도, 그 비슷한 것은 하나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웁살라 대학뿐만 아니라 각 대학도 모두다 스베덴보리가 잘못 되었다고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리하여 영의 자유에 대한 매우 중요한 재판은 끝났다. 몇 년이 지나서 스웨덴 사람들은 종교의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붸스트로 요티아에 굳게 뿌리를 내렸다.

여기에서는 사상이 대단한 자유는 기운이 넘치고 존경과 숭배를 모은, 한때의 감독 에스바 스베드 베리 에게 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칼라의 교회구역은, 활발한 운동의 한복판이 되었다. 종교에 목숨을 바친 이는 끊이지 않았다. 스벤 쉐밋드 목사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가르쳐야 한다고 내세웠기 때문에, 그 직책은 빼앗기고, 미친놈이라고 선고 되고, 감옥에 갇히었다. 지방에 있는 목사가 만족스럽지 못해 한 것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우스운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혼인하지 않은 늙은 부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은, 스베덴보리가 마태복음 22: 29~30절에 있는 구주의 말씀을 거슬러서 영원한 세계에서 모든 사람에게 복스러운 혼인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에 아주 그 가르침에 홀려 있다고 말합니다.』그러나 법무부 장관은 정통 설에 거슬린 이 가르침도 너그럽게 보아서 『늙은 부인은 타 이름보다는 동정함이 낫다』고 말하고, 왕에게는 그 일에 손대지 말 것을 권고하고 스칼라의 목사는 『무엇인가 더 값나가는 것을 찾아서 펜을 드는 것이 좋다』고 안을 냈다.

 

요한 로센 박사는 그가 그 속에서 그렇게도 중요한 구실을 한, 그 종교재판의 마무리를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는 1773년 [죽은 지 1년] 8월에, 병으로 쓰러져 다음 달에 세상을 달리 하였다.

 

1779년 [죽은 지7년] 2월, 베이엘 박사는 신학을 다시 가르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보다도 귀한 자리 오름(승진)이, 이 학식이 많고 고난을 견디어 낸 일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땅 위의 무거운 짐에서 풀려나, 다른 더 좋은 세계에서 친구인 요한 로센과 그가 존경한 스승, 임마누엘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다. 베이엘 박사는 13년에 걸쳐 스베덴보리의 「신학책 최초의 찾아보기」라고 이름 붙인 훠리오 판으로 된 큰 책을 썼는데, 그것은 암스테르담에서 아름다운 모양새로 인쇄 되었다. 그는 그 마지막 한 쪽을 인쇄소에 보내면서 병들고 자리에 누워 2~3일 지나서 세상을 달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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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그의 마지막 외국 여행을 뜨기 조금 전에 아돌프 후레데릭크 왕을 다시 만났다. 폐하는 대단한 호의를 보이고, 법무부가 스베덴보리에게 가졌던 태도에 관하여, 그가 따지는 탄원서를 냈던 일을 몸소 말했다.

 

『교회 회의는 내 편지와 당신이 쓴 책에 대하여 잠잠하고만 있었습니다.』고, 왕은 손을 스베덴보리의 어깨에 올려놓으면서 말하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들은 아무것도 비난할 것을 그 안에서 찾아내지 못하였으며, 당신이 쓴 것은 참이치와 꼭 맞는다고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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