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생애와 신학사상

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가정에서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16:00
  • hit231
  • vote3
  • 59.14.12.219

가정에서

 

 

1724년[36세] 5월 초순, 스베덴보리는 악스말에서 스톡홀름에 돌아오는 중에, 웁살라에 들러서 에릭과 안나를 찾아보았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문헌협회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웁살라의 그룹은, 런던의 왕립철학 학사원과 그 총재인 한스 스론 경과 편지로써 접촉하고 있었다. 스론 경이 여기저기서 모아들인 미술품은 영국 박물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벤세리우스는 스베덴보리에게 런던에 있는 학사원 회부에 뭔가 원고를 싣도록 제안하였는데, 스베덴보리는 야금학을 다룬 것으로써, 그것을 인쇄하는데 드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좋다면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듯하다.

 

 

8월, 스베덴보리는 벤세리우스에게 환대해 준 것을 감사하고, 스톡홀름에서 미국에서 막 돌아온 동생을 만났는데, 에스바는 데라웨어의 식민지에서 열 두해 동안 목사일 을 담당하다가 돌아온 안드레아스 헷세리우스 목사와 함께 왔다고 씌어있다.

 

스베덴보리가 안드레아스를 마지막으로 만난 때는 1711년 [23세]런던에 있을 때였고, 동생인 에스바는, 둘이서 웁살라에서 학생으로 있어서 만날 때가 드물었는데, 그 때에 에스바는 열다섯 살이었다.

 

 

스베덴보리 동생의 성격은 스베덴보리의 성격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에스바는, 아버지처럼, 에스바라고 이름 지은 일곱 번째 아우의 일곱 번째 아이였고, 이 아이도 또 에스바라고 이름 지었다! 감독은 이아들을, 그의 청년시대는 『기품과 성질이 좀 거칠어서』, 밖에 나가서 세계를 보고자 하는 열의를 갖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스베덴보리의 동생은, 어려서는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무서운 선생님 때문에 온통 공부가 싫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이 무서운 선생님』은 다름 아닌, 지금 같이 미국에서 돌아온 사촌형제인 안드레아스 목사이며, 안드레아스는, 감독이 기록한대로는 성질이 급하고 따뜻함이 모자란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에스바는 3년 동안, 찰스 12세의 군대에서, 뎃켈 장군 밑에서 스트라르슨드를 지키는 싸움에 나갔다. 그는 중위로 제대하였다. 그러나 『청년의 거칠음』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것을『바다의 거칠음으로 휘게 하리라』생각하여, 1714년 [26세]에 그를 영국에 보내서 항해학을 배우게 하였다. 영국은 막 놀아난 바탕을 뿌리째 뽑아버리기에는 알맞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서 아버지 에스바는, 그를 아메리카의 펜실바니아에 보내서, 자기수양을 배우게 하여서, 거기에서 그는 불러들일 때까지 아홉 해 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교도와 여러 교파에 딸린 기독교도들로 섞여 있는 그 먼 나라에서, 에스바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을 알고, 제 자신을 아는 일을 배웠다. 자기는 거기에서, 매우 쓰라린 생각을 하였다고 그는 말하였다. 자기는 데라웨어의 자시 쪽에서, 스웨덴의 아이들에게, 통나무집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계로 삼았다.

 

 

그렇지만 에스바는 미국이 좋아져서, 그곳에 아주 눌러 앉을까 깊이 생각을 하였다.

 

그는 스웨덴에서 옮겨온 사람들을 아주 추켜세웠다. 그들은 주로 선량한 사제들과 감독인 그의 아버지께서 보내주는 책들 때문에, 덕이 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보냈다. 인디언들은 스웨덴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만약 그 이교도들이 스웨덴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벌써 아주 오래전에 기독교도를 쫓아내고, 제 땅을 되찾았을 것이라는, 에스바의 의견이었다.

 

 

에스바 스베덴보리가 그가 태어난 곳에 돌아왔을 때,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임마누엘이 그들의 의붓어머니의 땅에서 그의 몫으로, 은 4,571다레루를 그에게 내어 주었다. 그것은 생각 밖의 선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에스바에게, 그 행운을 편지로 알리긴 했지만, 그편지에 찍힌 날짜는 1724년[36세]4월 20일 이었기 때문에, 편지가 그에게 도착할 리가 없었다. 에스바는, 그때에는 고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그 편지는, 새 세상인 아메리카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거기에는 아들에게 그곳에 눌러 않기를 권하고 있다.

 

 

『거기서 잘 해나가도록 하여라. 여기에 있어도 아무것도 좋은 일은 없다. 너는 글씨도 좋고 계산도 잘한다. 고마운 것은, 너는 결혼하지 않았다. 충분한 지참금을 가진 착한 아내를 찾아보아라. 하나님께서 바라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여라. 네가 사랑하는 아버지, 에스바 스베드베리.』

 

 

에스바는 집에 돌아온 지 한 해가 지났지만, 아메리카로 갈 것인지, 아닌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 일을 형에게 편지로 의논하고 있다.

 

 

 

『내게는 가고 싶은 생각이 태산 같은데, 그러나 이러한 일에는 좋은 충고가 때로는 매우 필요합니다. 가기를 권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냥 여기 있으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대부분은 가는 것을 그만 두라고 합니다.』[부른스보 1725년 [37세]2월].

 

 

임마누엘이 어떤 충고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3월 6일에 에스바는 배를 탈 생각이었다. 그는 패스포드(허가증)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뒤에는, 크리스티나와 혼인하고 시골로 내려가 작은 농장을 샀다. 거기에서 에스바와 크리스티나는 열 사람의 가족-딸 여덟과 아들 둘-을 얻었다.

 

 

스베덴보리의 누이동생 카타리나의 남편 웅에는, 임마누엘에게 편지로, 에스바와 나는 땅을 샀으며, 나는 그 땅에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하여 집을 두세 채 짓고 있는데, 아주 행복합니다. 라고 전하고 있다.

 

 

어째서 임마누엘은 혼인을 하여 즐거운 가정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친척들은 당신이 혼자 있는 것을 걱정합니다.『에스바 스베덴보리는 조그마한 땅을 샀습니다. 그도 자기 일은 스스로 해나갑니다. 제일 좋은 것은, 그는 남의 눈에 나타나지 않고, 경제적으로 낭비도 않고, 거기에다 선량하고 믿음이 깊은 아내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왜 당신은 좋은 짝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물리치는 지를 잘 생각해 보라고 당부합니다. 오테루 소령은 탐 씨의 맏딸과 약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일 마음씨가 곱고, 제일 고운 아내를 맞아들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무엇인가 손을 써 볼 생각은 없습니까? 탐씨는 이일을 잘 생각해 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의 딸들에게는 막대한 지참금이 있고, 그래서 당신이 나라 안을 다 뒤져보아도, 이처럼 좋은 짝을 만날 수 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힘을 내십시오. 시간은 망설이거나 이것저것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때를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1729년 (41세)].

 

 

스베덴보리가 이 편지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3년 전[38세쯤]에, 그는 카르르스탓드의 감독인 엔스 스튜기스의 딸에게 혼인하자고 했던 일은 알려진 일이다. 이 일은 처녀의 아버지가, 그 처녀의 할아버지인 웁살라 대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다.

 

 

『내 사랑하는 딸 스테나 마야는, 바로 이때쯤 몇 사람에게서 청혼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마기스텔의 아르네르 씨, 수사(修士)스베덴보리 감사관, 케델크륫 시종(侍從) 등입니다. 나는 아르네르 씨가 내 경우에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지만, 딸아이는 케델크륫 씨를 고른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구혼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또 당신에게 이 일을 알려서 당신의 생각을 알아보기 전에, 결정적인 회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끄셔서, 그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고, 모든 이가 만족하게 되기를!』[1726년(38세)3월 2일].

 

 

스테나 마야는 열일곱 살로, 세 사람의 대 감독과 두 사람의 감독의 후예인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이름난 대감독 호간 스페엘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선택한 이와 혼인하여 13년을 더 살았다. 이 편지는 스베덴보리가 「포르헴의 딸」과의 일로 실망하기는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믿고 있듯이 혼인의 행복을 몽땅 버리고만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써 우리들의 주의를 끌게 한다. 그러나 스테나 마야에게 하였던 구혼의 실패는, 아마 그에게서 그런 생각을 뽑아 버렸을 것이다. 그는 이듬해 가을에 처음으로 동네에서 아파트를 빌리고 심부름꾼을 두었다. 이것은 임마누엘의 나이도 이제는 39세가 되어서, 자기 자신의 집에 자리 잡고자 한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1725년 [37세] 여름, 스베덴보리가 사랑한 조카, 에릭 벤세리우스의 아들이 스톡홀름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렀는데, 삼촌은 그에게 물리학과 고등수학을 몸소 가르쳤다. 젊은 에릭도 지금은 20세가 되었으며, 야금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일은 임마누엘을 몹시 기쁘게 하였는데, 그는 그 방면으로 나아가기를 언제나 권하였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이 청년에게, 언제나 부드러운 마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웁살라에서 누나 집에 살고 있을 무렵인 1705년 [12세]에 태어났다.

 

 

그는 종종 『자그마한 에릭』에게 선물이나, 그 밖의 정표가 되는 것을 보내었고, 그의 편지는 그가 하는 일을 전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 예를 들면, 1715년 [22세]여름에, 『형제, 자그마한 에릭』이 부친 아름다운 라틴말 편지를 받고, 삼촌은 그 답례로 라틴말로 지은 즉흥시를 써서 보냈다.

 

 

짧은 연수기간을 거친 후에, 젊은 에릭 벤세리우스는 광산국에 들어갔고, 얼마 아니 가서 다레카루리아의 대동산(大銅山)감독관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서, 그의 삼촌이 언제나 이 젊은이를 사랑하는 뚜렷한 표가 나타났다. 스베덴보리는 에릭이 몇 달 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거기에 있는 광산을 보고 배우는 여행비용을 대주었던 것이다.

 

 

1760년 [72세], 에릭은 감사관이 되었고, 3년이 지나서 고문으로 퇴임했다. 그는 크리스티나 에렌 호름과 혼인하였고, 한스 임마누엘이라고 이름 지은 아들 하나를 남겼고, 그 시골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 cy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