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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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들온 돈 (收入)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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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온 돈 (收入)

 

 

스베덴보리가 다레카루리아 스타르보에 있는 헤드빅과 벤셀쉐르나 집에 있을 때에, 그가 사랑하는 의붓어머니인 사라 베뤼아가, 1719년 [31세] 3월3일에, 폐렴으로 얼마 동안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았다. 곧 그는 부른스보로 떠났다. 거기에는 23년 동안 함께 산,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의 아버지가 계셨다.

 

 

사라 베뤼아는 스타르보와 그 밖에도 갖고 있던 귀중한 광업방면의 재산을 여섯 명의 스베드베리 아이들에게 남겨 놓았다.

 

 그 중에는 철공장, 방바닥에 붙어있는 네모진 불담이(화로), 숲과 밭이 있었는데, 그것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되어 있었다. 임마누엘은 의붓어머니의 유별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의붓어머니가 만약 남편에게서 그 뜻을 바꾸도록 설득을 받지 않았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임마누엘에게 주고자 하였다. 남편이 다른 아이들도 빼놓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였을 때에『그 아이들에게도 공평하게 나누어 줍시다. 그러나 스타르보 만큼은 임마누엘에게 주어서 다른 것을 사들일 수 있게 하여 주세요』라고 말했다. 사라 베뤼아는 또 그가 죽은 지 1 년 동안은, 스타르보의 모든 수입을 임마누엘에게 주도록 손을 썼다. 사라는 또 그가 죽기 하루 전에, 증인 세 사람 앞에서 그의 손녀인 사라 룬드스텟드도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 속에 들게 하여. 각각 1/7씩 받도록 손을 써 두었다.

 

 

그 상속인 중에서 두 사람이 유언 중에 있는 이 항목에 반대의견을 달았으나, 베뤼아의 뜻은, 임마누엘이 법정에 제출한 문서 때문에 지탱이 될 수 있었다. 사라의 형제 페델과 사라 자매의 두 아이도 합의했지만, 감독이 자기 재산에서 곧 일만 이천 다레루를 그들에게 주어서 그 요구를 풀었다. 최종적으로는 스베덴보리와 라루스 벤셀쉐르나가 같이 그 재산을 얻고, 다른 상속자들의 권리는 다시 사들이기로 하였다.

 

 

값은 모두 삼만 이천 다레루로 감정되었고, 스베덴보리는 4천5백 다레루를 받았다. 이 결정은 임마누엘에게 대단한 도움을 가져왔다.

 

 

라루스 벤셀쉐르나는 스타르보에 살면서, 그 재산을 관리하여서, 공부 좋아하는 의형제는 여행과 연구만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유산이 1721년 [33세] 4월 16일에 나누어졌는데, 라루스와 임마누엘은 또 친어머니인 사라 베엠이 물려 준 재산 곧 앜스말과 그 밖에 있는 철공장의 다른 아이들에게 상속할 몫을 물려받았다. 굉장히 큰 왘스말에는 길게 뻗은 바닷가와 발트 해에 인접한 그 토지, 자신의 항구와 수마일이나 미치는 숲이 있었는데, 그것은 용해용(溶解用) 숯으로서는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스베드베리의 아이들 모두는, 그 전 재산의 1/5을 받고, 다른 1/5는, 그들의 이모이며, 미망인인 브리타 베엠이 받았다.

 

 

스베덴보리가 그 기간의 거의 보수가 없는 연구에 바칠 수 있었던 넉넉하고도 독립된 수입은 그 철공장의 경영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가 여러 번, 광산국에서 봉급을 받기 위해서 쓸데없이 안달하였던 때의 그에게는 특히나 다행한 것이었다. 임마누엘은 부른스보에서 유익한 때를 보냈다.

 

 

그는 사촌형제인 요한 헷세리우스가 가지고 있는 화학책을 찾아냈는데, 그는 그것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헷세리우스는 임마누엘보다는 몇 달 위였으며, 목사관에 살면서, 저녁마다 첼로로 찬송가를 연주해서 감독을 기쁘게 하였다. 임마누엘은 과학적 모든 발견에 흥미를 품고 있었다. 『나는 지금 헷세리우스가 갖고 있는 모든 화학책을 내리읽고 있습니다. 나는 불과 쇠붙이에 관계된 것은 모두 철저하게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보일(그밖에 다른 이의 화학실험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철저히 조사하고, 거기에 기하학과 역학을 대조시킵니다. 이미 행하여진 한없는 양의 실험이 연구를 계속하는데 충분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이들의 수고를 이용하는 것, 거기에서 화학, 야금학(冶金學), 불이라고 하는 것들의 성질에 대하여 엄청난 것들이 연역(演繹)됩니다.』[부른스보 1720년 32세 5월2일].

 

 

자연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연구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15년 동안에 걸쳐서, 그 자연과학 얼안에서 추구한 연구목표를 대강풀이(개설)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가 왜 이 때자리(時點)에서, 해부학에서 화학으로 옮겼는가, 이일을 「떨림」을 다룬 『불과 색채의 성질에 대하여』라는 연구에서, 말하자면 조금 샛길로 빠진 것이라고 한다면 가장 잘 설명되지 않을까. 이후의 연구는, 논문 그대로 남아있는 작은 논문이긴 하지만, 이 논문 셋째 항목에, 그는 보기감각과 듣기 감각에 관련하여, 공기와 에텔의 운동을 말하며, 파동(破)을 많은 분자의 국부적인 운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여, 분리된 제각기 작은 분자의 진폭엣 생긴 진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가 『충풍로(衝風爐)』를 다룬 논문은, 불에 대한 것을 더 많이 알기 위하여 쓴 것이고, 광산국에 내놓은 청원서에 『나는 불의 성질을 탐구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고 말하고 있다.

 

 

화학은 더 말할 것 없이 그가 선택한 직업인 광업과 야금학에 아주 가깝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를 반하게 한 것은, 그 마음에 깃든 새 힘, 곧 기하학과 역학에 관한 지식이었다. 이것은 그가 손을 댄 모든 것을 설험으로써 쓰이는 새로운 장치 같은 것이요, 우주의 밑바탕에 있는 원리들, 말하자면 보물 광을 여는 알라딘의 열쇠를 찾아낸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연에서 아직 풀리지 않는 내면을 여는 모든 문에, 그 열쇠를 적응시킬 만큼 탐구심에 불타고 있었다. 자연의 얼개(구조) 그 자체는 이 열쇠로 말미암아 밝혀질 것이다.

 

 

화학도 역(力)학으로 설명이 된다. 이것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과학에서 미룸(추량推量)은 쓸모가 없다. 계승된 정리(定理)에도 기댈 수가 없었다. 사실에는 오직 사실을 적용할 뿐, 거기에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물질의 원인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단 논문에는, 대기를 구성하는 분자는 둥근꼴이었고, 밀도에는 세 규칙(度)이 있다. 부동성(不動性), 불활성(不活性)분자는 가동성(可動性), 활성(活性)의 원바탕이 다 죄어서(압축되어서) 형성되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유황」과 「소금」은 창조할 때에 불과 물의 티격(알력)으로부터 생긴바, 유황은 기름이 되고, 소금은 흐르는 용암이 되어, 마침내 다죄어서 땅의 물질 그것이 되었다.

 

 

스베덴보리의 철학적인 생각은 포르헴처럼 데칼트파의 한 사람, 곧 그는 데칼트와 함께 『자연은 하나의 기계와 같은 것이다』고 믿었다. 또 그는 해는 소용돌이치면서 존재한다는데 대한 데칼트의 견해를 받아들여, 물질의 변화는 모두가 운동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러나 창조에서의 운동의 작용에 대한 생각은 천천히 익어져, 그것은 새롭고, 참말로 혁신적인 것이 되었다. 거기에는, 물질의 동적인 기원의 이론이 맨 처음으로 싹터서, 『서로 떨어진 수 없는 원바탕의 꼴이 연속적으로 맨 처음 무한자 - 신 - 에게서 창조되었다』는 견해가 제창되고 있다. 이들 분자의 꼴과 특성에 대해서는, 그는 데칼트와 달리 하였다. 그는 데칼트의 생각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웁살라의 교수들에게 강한 항의를 했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을 받아 들이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 그 생각을 늘 마음에 두고 검토하고, 거기에 그 자신의 생각의 틀을 세운 것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공기와 물의 분자에 관한 새로운 것을 보냅니다. 그것은 그 분자가 둥근모양이다는 것인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철리(哲理)와 부딪힐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증명과 기하학 위에 내 이론을 두고 있기에, 누구든지 합리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그의 목적은 『철저하게 공기와 물의 모든 부분의 성질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분자의 형태가 한 번 발견되면, 우리들은 그러한 형태에 딸려있는 특성을 모두 알게 됩니다.』[스타르보, 1718년 30세 1월 30일]

 

 

1720영 [32세] 12월에, 감독 스베드베리는 화룬에 있는 수석사제의 딸, 크리스티나 알샤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세 번째 혼인이었다. 임마누엘은 부른스보에서 감독의 의붓아들, 곧 그 때에 스카라 남쪽 약 10 마일에 있는 교구 목사 요나스 웅게의 주례로 거행된 혼인예식에 참례하였을 거라고 생각된다.

 

 

다음해 2월, 스베덴보리는 여동생 헤드뷕의 어린 딸아이의 대부로서 입회하였다.

 

 

바야흐로, 스베덴보리는 외국에 나가서, 거기에서 그가 연구한 결과 가운데서 얼마를 라틴말로 책을 내려는 계획을 실현할 때가 왔다. 거기에 들어가는 경비는 의붓어머니가 남겨준 것으로 충분하였다. 5월의 끝 무렵, 그는 코펜하겐과 함부르크를 거쳐서 오란다에 가려고 스웨덴을 떠났다. 그와 함께 할델빅 대학에서 의학의 학위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촌형제 헷세리우스가 그곳에 있었다. 헬슨보루이에 도착해서 덴마크를 향하여 사운드 해협을 건널 때. 스베덴보리는 광산국에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그가 의연히 광산국과의 관계를 갖고자 하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단 하나의 목적은, 외국의 광산을 자세히 알아보고, 외국의 쇠붙이 시장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 계획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정보와 지도를 원하고 있었다. 교육을 잘 받고 자란 동료들은, 그 편지를 다른 청원서와 같이 파일에 끼워 넣는 것 이외는, 다른 관심을 쏟은 흔적은 없다. 새 정부는 이 일에 있어서는, 다른 많은 일도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왕조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모두 씻어내서, 챨스 12세의 총신들은 거의 다 생각 밖이었다.

 

 

그 총신(寵臣)중에는,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와 크리스토퍼 포르헴도 들어 있었다. 기우고매(氣宇高邁)한 젊은 감사관이 다른 얼안에서 활동을 구하였다는 것은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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