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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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나라의 발명가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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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나라의 발명가

 

 

스웨덴에는 아름다운 동산은 많지만 경치가 뛰어난 산은 많지가 않았다.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중의 하나가 킨네쿠레 산인데, 그것은 벤넬 호숫가의 모래톱에서부터 우뚝 솟아 있어서, 그것을 멀리서부터 공손하게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작은 동산을 누르고 있다.

 

 

1715년[27세]의 8월 5일, 스베덴보리는 그 산 한쪽 편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15마일 떨어진 곳, 부른스보에서 여름을 나고 있었다.

 

스웨덴은 과학에서, 특히 천문학에서는 다른 여러 나라보다 훨씬 떨어졌다는 것이 임마누엘에게는 그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만일에 스웨덴 사람이 날도(경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제공되는 상금을 요구할 수 있다면, 그 자신의 방법을 외국에 있는 능력 있는 권위자들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데, 다만 그것을 완성하는 데는 정확한 루나 테이블[Luna table(月運行表)]만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 어디에도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웁살라에 하나 있는 그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연모(기구)밖에 갖추지 못해서, 그것은 스톡홀름의 씨도(위도)와 날도(경도)조차도 정확하게 정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젊은 스베덴보리는 사설 관측소를 세울 수 있는 땅을 찾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겨울동안, 그의 논문에 필요한 관측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땅의 꼴과 그 밖의 것에서 관측하는 가장 알맞은 땅으로 그의 눈에 띄었지만, 그곳이 가장 알맞은 곳이라는 것은 그 당시엔 알지 못하였고, 현대에 와서 비로소 지질학자들은, 그 곳이 빙하시대의 박물관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사설 관측소를 결코 세우지 않았다. 그해 가을에, 그는 웁살라를 방문하여 친구와 여러 친지와의 교제를 새롭게 하였으며, 아마도 에릭 벤세리우스에 의하여 다른 계획이 그때에 제출되었다. 벤세리우스나 교수들은 관측소를 세우려면 변두리의 산꼭대기보다는 웁살라가 훨씬 알맞다고 생각 하였으며, 그로부터 25년 후에는 실제로 그것이 세워졌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나라를 건설적인 방법으로 섬기려는 생각으로 불타고 있었다.

 

조국은 다시 우뚝 솟게 할 자를 얼마나 찾고 있었을까!

 

그는 대학 교수직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과학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그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웁살라에는 포르헴의 자료가 있으며, 벤세리우스도 언젠가는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어 하였다. 『학문과 공업』을 위해서도, 그 때는 무르익고 있었다.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내는 과학잡지는 외국잡지의 엮는 본을 따랐으며, 특히 그것은 스웨덴 사람 모두의 마음에 과학탐구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라틴말 대신에 스웨덴 말로 내기로 하였다.

 

또 그 잡지는 장래의 학계에, 기초로써 도움이 되도록 계획되었고, 사실 그것의 기초가 되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웁살라 과학협회는 이 간행물을 그 회보의 처음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세계 최초의 발명가로 생각하는 그리스의 현민의 이름에 기인하여 『북쪽 나라의 다에다루스(Daedalus Hyperboreus)』라고 이름 지었다. 다에다루스와

 

 

잡지를 내는데 는 밑천이 있어야 했다. 대학 교수직을 얻게 되면 그 문제는 풀리리라. 그러나 대학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그는 벤세리우스에게 공학 강좌 두기를 제안했다. 아마도 그것은 다른 교수들의 봉급을 줄임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수학과 과학의 강좌는 철학 강좌와 같이 필요하고, 유익하고, 나라에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 배경을 주장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대학 경비의 1/7을 벼름(배당)하는 것이지만, 광업과 해운업 등 여러 가지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힘줘 말하였다.

 

이 제안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도서관원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교수의 봉급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일에 감히 이런 지나친 변경을 제안한 젊은 포부가 (抱負家)에게 타일렀다. 스베덴보리는 서둘러 이에 대해서 변명하고 있다.

 

“나의 제안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수들이 스스로 손해를 보면서 까지 나를 지지해 주기를 바랄만큼 내 자신을, 또 웁살라에서의 내 입장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을 벗어나고 또 유쾌하지 못한 제안으로 당신의 깊은 생각과 상상에 하소연 하여 무언가 좋은 일을 생각해 주셨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일을 한 농담으로 쓴 것인데, 진실을 말하므로 써 바로 잡습니다. 나는 그 일을 당신에게 보내 드린 봉투 속에 잘 감추어서 누구도 그것을 엿볼 수 없게 하였으며, 거기에 내 도장을 찍어 놓았기 때문에 더는 퍼질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학부가 세워지는 방안이 제출되어, 그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교수직 몇 사람이 퇴임하므로 아주 쉽게 수행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부른스보, 1716년 [28세]).

 

 

“수학자들이 주로 이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들의 죽을 상처입니다”. 고 스베덴보리는 신음한다. “ 내 생각은, 만약에 수학자 열 사람에게 한 사람의 철두철미한 실제적인 수학자가 있어서 그가 다른 사람들을 장터에 데려갈 수가 있다면, 그런 경우에 그 한 사람은 열 사람 모두가 함께한 경우보다 더 명예를 얻게 될 것이요, 나아가서 나라에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겠죠......”.

 

오직 공학부 설립의 일만이 병든 나라 땅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른스보, 1716년 [28세] 6월 2일).

 

 

다음해 가을, 대학에 빈자리가 생겼고 종교 법원은 스베덴보리의 교수직 요청을 지지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다.

 

임마누엘은 벌써 왕의 가까이에 있었으며 스스로 스웨덴에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에다루스』의 발간은 현실화 되었다. 에릭 벤세리우스는 그 잡지 엮음을 크게 도왔고, 당시의 왕실 공문서 보관소 임원이었던 형제인 구스타흐가 스톡홀름에서 그것을 인쇄하는 일을 돌보아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포르헴은, 그 잡지 머리말에서, 자기에 대해 불려 말하는 「기리는 말」을 겸손하게 물리쳤다. “그 일에 대해서는 참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좀 더 눈에 띄지 않도록 해 주었으면 합니다. 민감한 사람은 거기에 노여움을 품을지도 모를 일이요, 이런 칭찬은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에겐, 더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포르헴은 “자료와 주제는 내가 살아 있고 하나님께서 내게 늘 건강과 정력을 내려주시는 동안은 빠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고 스베덴보리에게 잘라 말했다.

 

지금 포르헴은 “남은 생명이 그 계획의 실행을 끊어 버리기 전에” 스베덴보리와 꼭 만나보기를 원하였다. 포르헴이 두세 번씩이나 자기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 왜냐하면 , 그는 아흔 살 많은 나이 까지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벤세리우스에게 『만일 그 청년이 다레카루리아에 있는 내 집을 찾아 준다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고 편지에 썼고, 또 스베덴보리 자신에게도 그 뜻을 되풀이 하였다. 『아주 먼 곳에 일부러 오시는 일이 당신에게 귀찮은 일이어서는 아니 되는데, 스테른슨드에 있는 나를 방문해 주신다면, 나는 그것을 대단한 은혜라는 느낌과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과 축복이, 즐거운 크리스마스 휴일이, 그리고 더욱 더 즐거운 새해가 당신에게 내리시를 참 마음으로 원합니다. 언제까지나 나는 당신의 더 없이 순종하는 종으로서 남습니다. 크리스토퍼 포르하마』

 

 

임마누엘이 포르헴을 찾아간 것이 2월초쯤으로 생각되는데, 그 때 그는 스타르보에서 - 거기에서 그는 여동생 헤드빅과 그의 남편인, 광산국에 있는 벤센쉐르나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는데 - 거기에서 잡지의 제2호에 대하여 그와 의논하려고 40마일이나 되는 길을 여행하였다.

 

 

임마누엘이 그때 열여섯 살 난 포르헴의 아들 가브리엘과 그의 두 딸을 만난 것은 그 때였다. 언니가 되는 딸은 마리아로 17세, 동생은 막 12세 된 에메렌티아였다. 이 에메렌티아는 스베덴보리의 평생에 머지않아 그 잊지 못할 역할을 하게 된다.

 

 

1716년 [28세] 1월 10일, 스톡홀름 신문에 『북쪽나라에 다에다루스』제 1호의 광고가 실렸다. 그 창간호에는 포르헴의 보청기와 스베덴보리가 쓴 몇 편의 작은 논문이 적혀 있었다. 제 2호에는 포르헴이 쓴 기중기의 논문과 화폐주조를 다룬 논문들과 최근의 일식에 관한 논문이 하나 포함되었다. 제 3호에는 중량과 도량, 공기 펌프와 공기의 측정을 다룬 논문이 실렸다. 다에다루스 제 4호에는 날아가는 기계에 대하여 다에다루스 적인 사색을 실을 계획을 하였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날아가는 기계는 지금의 비행기를 생각했다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막음장치(제어장치)가 달린 글라이더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것은 바람을 이용하여 날고, 지붕 위에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포르헴은 그 논문을 인쇄하는 데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사람의 손으로 나는 일은 끊임없는 운동과 같은, 얼핏 쉬운 일 같지만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제가 날아가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다만 『우리들은 하늘을 통하여 우리들을 보내는 기계를 발명할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하늘을 우리들이 그리로 날아오르지 못하게 닫아 버릴 수는 없다』고 많은 것에서 결론짓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익살(유머)이 넘치게 훤타넬에서 따오고 있다.

 

『날아가는 기술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그것은 앞으로 완전하게 되어 언젠가는 사람이 달에도 날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발명했든가, 또는 우리들은 지식의 끝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이 제와서는 거기에 보탤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합니까. 당치도 않는 말 같지만, 다음에 태어날 여러 세대의 사람에게도 아직 무언가가 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동의합니다.』

 

 

포르헴이 스베덴보리와 함께 품은 많은 관심 가운데 하나는 스웨덴의 일반 사람들에게 『산수의 학문』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포르헴은 이 학문의 기초를 57장으로 한 데 묶었다. 그 책은 임마누엘이 스웨덴 말로 다에다루스를 간행한 것과 같은 목적으로 일반 대중의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임마누엘의 지나친 열심은, 포르헴이 지은 책을 자신의 비용으로 출판하게 했다. 그것은 잇속을 얻기 위한 출판업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은 책이 당장에라도 일반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가 『다에다루스』제 5호에 실린 『이상한 마개』의 논문을 손에 넣은 것은 아마 그가 스테른슨드에 있었을 때일 것이다.

 

이 마개는 묘한 일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 졌다.

 

포르헴에게는 그에게 맥주를 가져다주는 일을 맡은 하녀가 있었다. 그 하녀에게 애인이 있었는데, 그 역시 맥주 당이었다.

 

 포르헴은 절약가로 알려졌는데, “하녀가 맥주 통이 비었습니다”고 알렸을 때, 통속의 것이 새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고 계산해서 밝혀냈다. 그래서 그는 교묘한 마개를 발명하여 그것으로 맥주의 소비량을 셈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는 저의 경제상의 안전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한 편으로 하녀의 덕성도 지켜졌다.

 

포르헴은, 학자들은 저들이 가르치는 항목을 실제로 시험해 보아야 한다. 『자연에는 데칼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믿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배제(配劑)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색을 대신하여 공학에서는 날마다 실험과 원인에 관계되는 반성을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모든 경우와 조건의 검토를 견디어 내지 못하는 어떤 것도 결코 시인하지 않는다. 하나의 일이 다른 일과 모순이 된다면 곧바로 나는 그 토대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포르헴과 스베덴보리는 스테른슨드에서 의논하는 중에, 평화가 찾아오면 웁살라에 공학연구소를 세우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 연구소는 수확을 크게 증진시키는 『신식 탈곡기』라고 하는 유익한 기계를 갖추게 하여 연구소는 이익의 절반을, 포르헴은 1/3을, 소장은 1/6을 얻는다. 이로써 외국인들은 『스웨덴 사람은 번영의 시기에는 의기양양하지만, 역경에서도 낙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포르헴은 왕 앞에 널어 보이기를 원하며, 임마누엘이 저와 함께 대궐 안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챨스 왕은 터키에 있을 때에도 포르헴이 발명한 것을 알고 있었고, 전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에는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임마누엘은 부른스보에 돌아가자, 그 나라를 걸어서 두루 다녔다.

 

그는 바위, 수원지, 땅, 흙을 조사하고, 그가 알아낸 것을 농사꾼들과 이야기 하였다. 물들이는 데 좋은 진흙이 있고, 질그릇과 흙으로 만든 파이프를 만들어서, 상업의 잇속을 올릴 수 있는 흰 진흙이 있다. 그는 또 『다에다루스』를 위한 논문을 써나갔으며, 포르헴의 『사물의 원인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단 논문 하나를 고쳐 썼다. 그는 비로소 - 여전히 달의 운행표는 없었지만 - 바다의 날도를 발견하는 해결방법을 써서 학자의 판단에 맡겼다.

 

 

스베덴보리의 나이도 이제는 28세가 되었고, 전과 다름없이 기우는 고매하였지만 정한 직업은 없었다. 포르헴을 따라서 왕을 뵙고져한 바람도 물거품이 되어버릴 운명처럼 생각 되었다. 챨스 왕은 그 나라에서 덴마크 사람을 내 쫓으려고 노르웨이 침공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이제 영락하고 말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마지막 고민은 머지않아서 온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 고민이 짧았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고 그는 썼다. 포르헴도 역시 지금은 『좋은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9월의 끝 무렵에, 스베덴보리는 다시 웁살라에 돌아와, 거기에서 요즘 비어 있는 교수직 자리를 신청했으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2,3일 후에, 젊은 과학자에게 좋게 되었기 때문이다.

 

칙령으로 포르헴은 가르르스쿠로나로 해군 보급 지를 위하여 건(乾)독(dock)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그것은 덴마크와의 해전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었다.

 

임마누엘은 포르헴을 따라가서, 『다에다루스』를 왕께 드리고, 과학추진을 위하여 다른 계획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그 잡지의 아름다운 판이 준비되고, 거기에는 마음을 다한 드림말과 다음과 같은 싯귀도 적었다.

 

 

보라, 다에다루스는 참으로 하늘을 날아 올라가

왕의 미노스의 땅에 놓은 덫들을 높은데서 멸시하노니,

진실로 나의 다에다루스여,

당신의 재주로 바람을 타고 깔보아라.

천한 무리들의 허방다리(함정)들을.

 

임마누엘은 스테른슨드에 있는 공장을 견학하고 나서 부른스보에 들려 하루를 보내고 룬드로 포르헴과 함께 떠났다. 이 두 사람의 현대의 발명가는 선인(先人) - 다에다루스 - 처럼 행운을 찾아서 떠났다.

 

어떤 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 옛날이야기에는, 그의 아들 이카루스는 자랑이 지나쳐서 아버지 다에다루스의 타이름을 무시하고 해에 너무 가까이 갔다. 햇빛은 그의 날개에 칠한 양초를 녹였고, 그는 바다로 곤두박질하였다. 발명도, 그 발명자신의 효력도, 후세에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현명한 길을 더듬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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