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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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대륙으로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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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14.12.219
영국과 대륙으로

 

 

바야흐로 서쪽으로 가는 항해가 처음인 이 젊은이는 정기와 높은 꿋꿋한 기운과 너른 마음(도량)으로 넘쳐 있었다. 우리들은 그가 쓴 편지와 일기에 적은 짧은 기록에서 그 심정을 알 수가 있다.

 

“런던으로 가는 길에 나는 네 번, 생명이 위험한 적이 있었다. 고 말하고 있다.

 

배가 모래톱에 걸리고, 나중에는 금지 물을 휘젓고 다니는 프랑스의 약탈 선에게 배가 수색을 받았다. 다음날 오후, 희미하게 밝은 가운데 영국의 돌보깃배(순시선)가 우리 배를 약탈선으로 잘못 알고 일제 사격을 하였으나 다행하게도 대단한 손상은 없었다.

 

이 배가 런던 항구에 닿고 나서 임마누엘은 더 큰 위험을 겪게 됐다.

 

스웨덴에 돌림병이 생긴 소식이 영국에도 알려져, 이 요덴부르이(Gothen-burg)의 배는 그 배 안의 모든 것과 함께 여섯 주간을 검역소에서 기다리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 몇이 요트로 다가와서 이 젊은 나그네를 알아듣게 하여 항구에 상륙시켰다. 검역소를 빠져나온 일을 파고드는 조사로 임마누엘은 붙잡히고 말았다.

 

 

“나는 교수형에서 살아났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에 그와 같은 일을 감행하는 자는 교수형을 피할 수 없다는 조건이 딸린 것이었다.

 

그 끝은 위험한 것인데도, 일이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무시한 젊은이의 행동은 비참한 형편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스베덴보리가 갖고 있었던 소개장을 받을 영국의 이름난 사람이 그가 풀려나는 것을 쉽게 하였을 것이다. 소개장 가운데는 스웨덴 대사 칼 이렌 보르아가 있었는데, 이 대사에겐 스베드베리 감독이 벌써 손숫글(친서)을 보냈다. 또 전에는 스톡홀름에 살았던 감독인 제임스 로빈슨이 있었고 - 런던 썬셑에 있는 감독의 집을 임마누엘은 나중에 방문했다 - 거기에다 스베덴보리 아버지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스웨덴 이주민 관할권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런던에 있는 스웨덴 교회의 관할권도 갖고 있었다.

 

그 때에 런던을 찾은 사람은 종종 장사꾼 집에 짐을 풀었다.

 

스베덴보리도 먼저 시계를 만드는 이의 집에, 다음에는 세간(가구)을 만드는 이의 집에, 나중에는 놋그릇을 만드는 사람의 집에 묵었다.

 

“나는 저들의 기술을 훔치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것은 쓸모가 있겠지요.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소개받은 학자들을 찾아가기에 앞서, 더 영어를 배워 익히고 져 애썼다. 그 사이에 책을 조금이나마 사들였고, 뉴턴과 다른 영국 과학자의 책을 열심히 연구 하였다.

 

임마누엘은 가끔 고향생각에 젖곤 하였다. “만약 당신이 내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갖는다면, 나 자신이 건강은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 곁과 또 내 가정을 떠나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다행히 당신의 편지를 받는다면 내가 고국에 돌아간 기분이 되겠지요......, 나는 이 시대의 삿포, *1)소피아 브렌나에게 바친 몇 줄 시 구절을 보냅니다. 만약 당신이 고쳐야 한다고 생각되면, 갈고 닦아서 더 좋게 한 뒤에, 부디 그 여자에게 보내주십시오”(런던 1710년 [22세] 10월).

 

*1) 기원전 600년 쯤, 레아보스에 살았던 그리스의 여류 시인.

 

 

(소피아 브렌나는 번거로운(장황한) 시로 그 때에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지만 만약 현대의 누군가가 그 여자를 칭찬한다고 하면,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서 자녀를 17명이나 키워냈다는 것을 들 것이다. 그 중에서 두 사람만 빼고서는 모두가 그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었다).

 

12월, 임마누엘의 외로움은 사촌형제 안드레아스와 구스다흐 헷세리우스가 스웨덴에서 영국을 방문한 일로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펜실바니아의 식민지로 가는 길에 런던을 들렸다. 스베드베리 감독은 안드레아스를 데라웨어에 있는 스웨덴 식민지 목사로 임명 하였다. 그 형제인 구스다흐는 새 세계 - 아메리카 - 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카의 저명한 그림 그리는 이로 명성을 얻게 된 사람이다. 헷세리우스가 쓴 일기 조각에서 이 젊은 세 사람은 함께 서울 구경에 나섰던 것을 알 수 있다.

 

 

“ 이 유명한, 모든 기독교 국가 중에서 가장 큰, 또 가장 인구가 많은 서울(수도)에 대하여 내가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다……. 단지 온 세계의 인종, 부, 영광, 굉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줄여 그린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것을 왕립거래소와 세관에서 - 그밖에 많은 곳에 관한 것은 새삼 말할 것 없지만 - 볼 수 있다는 것만 말해 둔다......”.

 

스베덴보리도 그가 본 많은 진귀한 것에 대하여, 예를 들면, 췌어링 클로스 너른 마당에서 본, 아프리카와 미국에서 온 『기괴한 동물과 원숭이』에 대한 느낌을 적었다. “무엇이든 그 거리에서 볼만한 것은 나는 벌써 다 조사했습니다. 장하고 아름다운 성 바울 대성당의 모든 부분은 이삼 일 전에 완성 했습니다” (런던,1710년[22세] 10월 13일)

 

스베덴보리가 처음 찾아간 런던은 큰불로 인한 잿더미 속에서 갓 일어난 새로운 거리로, 크리스토퍼 렌의 화려한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공기는 도붓장수(행상인)가 질러대는 고함소리로 찢기고, 수채와 수챗물에서는 역한 냄새가 나고, 길강도와 소매치기는 불빛이 좋지 않은 길거리를, 특히 해가진 뒤에 걷는 것을 무섭게 하였다. 사무엘 존슨은 교통의 방해가 되었던 쓰레기 더미를 적고 있다. 상류사회 사람들이 어깨에 메는 바구니에 업혀 다니는가 하면, 불구가 된 가난한 사람은 맨발로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도망치듯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스웨덴에서 영국을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것은 저들의 나라에서는, 아니 세계의 어떤 곳에서도 전혀 볼 수 없는 아주 다른 일이었다.

 

런던의 1월은 스웨덴의 5월이다.

 

스웨덴 교회의 목사인 에드사르두스 박사(Dr. Edzardus)정원에는 백합이나, 다른 꽃이 한창 피고 있었다. 이 집은 거리에서 5 마일 떨어진 교회에 있었으며, 임마누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따금씩 그곳을 방문했다.

 

 

임마누엘은 망원경 관(管), 사분의(四 分), 프리즘 같은 것들을 산 다음에 공기 펌프를 살만한 돈이 남기를 바랐다. “ 당신은 과학 공부를 계속 하라고 격려하지만......” 하고 그는 얼마 지나서 벤세리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이 어떠냐 하면 , 썩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나는 특히 천문학과 공학에 억누를 수 없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런던, 1711년[23세] 4월).

 

그는 매일 그 거리 최고의 수학자들을 찾아뵈었다. 특히 그는 존 흐람스티드 목사 밑에서 처음 일 년을 거의 보냈다. 흐람스티드 목사는 런던에서 약 9 마일 떨어진 교회에 있는 그리니치 관측소 소장이었다.

 

이 원숙하고 경험 많은 천문학자는 22세의 스웨덴 학생과의 사귐을 즐긴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흐림스티드의 관측과 계산에 대하여 오래도록 의논하였기 때문이다.

 

이 젊은 과학자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공간의 깊은 못을 차례차례로 밝히 보여주는, 완성단계에 이른 망원경 밑에 벌어지는 별의 세계를 응시하였을 때에 어떤 전율을 느꼈을까!

 

당시 영국의 통상은 세계 각국에 뻗쳐나가서 끊임없이 선대(船隊)를 늘려야 할 필요가 쫓기게 되어, 바다의 경도(經度)를 정하는 일은 영국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요한 일 이었다. 그래서 이 일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정부는 그 경도를 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많은 상금을 내 걸었고, 과학자들은 가는 곳마다 다투어 이 문제를 달려 붙어 있었다.

젊은 스베덴보리도 정혼(精魂)을 기울여 그 해결에 정신을 쏟았다.

 

1711년[23세] 8월에 그는 벤세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

“천문학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 많은 것을 발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팠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사색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지구의 경도를 아는 여러 가지 제안들을 꼼꼼히 따져 보았으나 방법을 새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머지않아서 나는 영국학사원에 이 주제에 관한 제안이 있다고 알려서, 내 요점(要點)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이 사람들의 좋은 평을 얻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여기에서 출판할 것입니다. 만일 여기가 아니라면 프랑스에서......, 나는 지금은 대수와 고등 기하학의 연구로 몹시 바쁘지만, 포르헴의 발견을 계속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향상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임마누엘이 포르헴을 경복(敬服)하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를 찾아보는 생각을 잊은 것이 아니고 다만 늦춘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벤세리우스는 편지에, 웁살라에서 돌림병은 사라졌으며, 교수들 중에서 죽은 사람은 없다고 알려왔다. 대학의 강의는 그 동안 중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벤세리우스가 앞장섬으로 교수 가운데 몇 사람이 모여서, 그 짬을 이용하여 도서관에 모여 자연을 탐구하고 그 결과를 토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협의회가 생겼다.

 

그 목적을 밀고 나가기 위하여 벤세리우스는 임마누엘에게 여러 가지 책과 연모를 저들을 위하여 사들이는 것을 부탁했다. 그 연모 중에는 현미경과 24피트의 망원경이 들어 있었다. 임마누엘은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 거기에다 제 돈으로 과학 문제를 다룬 많은 책을 사서 보내주었다.

 

웁살라에서는 요사이 발표된 뉴턴의 인력 설을 영국의 수학자들이 -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품고 있었다. 한 떠돌이별(혹성)이 인력으로 다른 떠돌이별을 끌어 당길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데칼트 파의 사람들에게는 실지 증명이 없는 말(사변)에 불과 하다고 생각 되었다. “그런 문제는 누구하나 영국 사람의 생각을 따져 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저들 나라 사람이 관계된 일에는 장님이 되 버리기 때문입니다”고 스베덴보리는 대답을 하였다.

 

“나는 1715년 [27세] 이전에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고 그는 결심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보드리 도서관 *1)을 꼭 보기를 원했으나 가진 돈이란 조금 뿐이었다. “여기에 나는 묵고 있지만 한 결같이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수표를 함부로 막 발행하여서 당신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을 편지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일 년 반이다 되어 가는데도 200릿크스 다레르*2)로 살게 그냥 둔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마실 것도 없이 스코네 여자처럼 산다는 것은 쓰라린 일입니다”

 

이 편지는 20년이나 식물을 빨아들이지 않고 살고 있다는 처녀를 말하고 있으며, 이 일은 그 감독 스스로도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런던 1711년 [23세] 8월).

 

*1) 17세기에 토마스 보드리경이 다시 일으킨 세계 굴지의 옥스퍼드 도서관

 

*2) 16세기에서 19세기 중간시기에 화란, 독일, 스웨덴, 덴마크에서 쓰이던 은돈, 대략 1달러

 

 

1712년 [24세] 1월 16일은, 영국에서 감사절이었다.

 

프랑스와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날 아침, 임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기다리고 기다렸던 공붓돈이 왔다. 옥스퍼드에서는 수학공부를 이어갔다. 그는 미국에 있는 영국 식민지의 씨도(위도)와 날도(경도)를 나타내는 지도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하레와 수없이 만나 이야기 했다. 8월에는, 스베덴보리는 심한 공부 끝에 녹초가 되었으며 또 얼마큼 낙심하여 런던으로 돌아갔다.”나는 내가 달을 근거로 하여 지구의 날도(경도)를 찾아내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은 내가 부르짖을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것이요, 가장 쉬운 일이요, 사실로 올바른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반증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달의 제길(궤도)이 아직도 완전하게 달의 운행표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인데, 흐라므스티드는 내게 그 표를 약속하였고, 그것을 보여주었는데 아주 잘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틀림없이 달의 운행을 가르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진짜라면, 나는 게임에서 완전히 이긴 것이오, 달을 근거로 날도를 발견하고자한 사람 중에 아무도 그 게임에서 이긴 이가 없다고 담대히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달의 운행이 고쳐진다는 가정에서만, 다른 사람들이 제창한 것 중에서 이러한 내 방법을 빼놓고서는 다른 어떤 것도 쓰일 수 없고, 하레 박사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요, 박사 자신이 내게 인정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영국의 여기에서는 이런 정숙하고 자랑이 센 사람들 중에서는 대단한 격려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나라를 찾아서, 거기에서 그것을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내게 날도(경도)에 관한 한 가지 제안이 있다고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절대로 불가능한 것으로 다룹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여기에서는 말할 생각을 않습니다.

 

그는 수학을 더는 연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부분을 찾아서 시(詩)쪽으로 돌렸다.

 

 

 

“나는 여러모로 생각을 했습니다. 한때, 나는 내게 해를 끼칠 만큼 사귐이 나쁜 자가 되었기 때문에, 또 내 정신이 좀 지쳐서 얼마동안 시를 공부해서 피로를 풀고 그것으로 원기를 회복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올해 안에 이쪽에서 이름을 얻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을 꼲음(판정)하는데 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조금 지나면 다시 과학을 연구하는데 매달려 볼 생각입니다......, 만일 내가 북돋움 받게 되면 그 분야에서 지금의 누구보다도 많은 발견을 할 작정입니다. 그렇지만 회복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감당 못하는 송아지로 밭을 가는 것처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될 것입니다”(런던,1712년[24세] 8월).

 

임마누엘은 옥스퍼드에서 문학방면의 인기를 끌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드라이덴, 스펜서, 밀톤, 코리, 보먼과 후렛쳐, 쉑스피어, 벤존슨 같은 유명한 영국 시인은, 그 상상력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읽기에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이었다. 이들 시인은 스베덴보리의 붓에서 막 흘러나온 라틴말로 쓴 시의 본보기가 되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베덴보리의 시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뛰어난 것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나는 말로 쓴 끼친 작품(유작)을 조금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빗드 *1)라도 내가 지은 것이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은 희망 잃음(실의)에 빠졌을 때에 또는 연구에 몹시 지쳤을 때에 시를 찾아갔다.

 

그는 부른스보에서도 옥스퍼드에서도 나중엔 그라이후스발드에서도 ......,

 

이렇게 한 일은 그의 맑고 표현이 풍부한 라틴말의 글체를 이루어 내는데 이바지 했을 것이 틀림없다.

 

 

스베덴보리의 영국 체재는 그로 하여금 마음의 보는 범위를 넓히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는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사귈 수가 있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사람의 정신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배우게 되었고 - 그는 이 일을 나중에 두세 번 더 말하고 있다. 그는 그 기간을 그가 일생 바침의 사업을 준비하는 시작으로 삼았다.

 

『나는 먼저 주님에 의하여 자연과학에 인도되어서 준비를 했다. 그것은 1710년 [22세]부터 1714년 [26세]에 걸쳤다』

 

영국 체재는 약 2년 반 이어졌고, 1713년 [25세]의 초반에는 화란에 있었다. 우드레크드

 

*2)에서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1) 오빗드(BC43-17 ?)는 로마의 시인. 어거스트 황제에 내쫓기어 귀양지에서 죽었다『변형(變形)』의 작자.

 

*2) 화란의 서울,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후의 여러 조약을 맺은 곳.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모여든 대사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영국 대표인 로빈슨 감독이 있었다. 그 청년은 그 때의 문제에 대하여 활발하게 논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가 스웨덴 국회의 의석을 얻게 될 때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

 

그는 스웨덴 대표인 훌륭한 대수학자(代數學) 요한 파름크비스트 남작을 몸소 만나 뵈었으며, 그 집에서 거의 날마다 수학에 대하여 오랜 시간 말을 나누었다. 이 정치가는 임마누엘과 사귄 것을 매우 기뻐하며 그를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레이덴 에서는 , 스베덴보리는 그 훌륭한 관측소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날도(경도)에 관한 저의 연구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달을 관측하는데 이 시설을 쓸 수 있다면! 그러나 이 바람이 실지로 나타났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 유명한 유리공업의 중심지에서 임마누엘은 렌즈 닦는 기술을 배워서 거기에 필요한 연모(기구)와 설비 모두를 사들였다.

 

파리에 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는 병에 걸렸다. 그래서 여섯 주간이나 그 연구를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고 있다. 스베덴보리는 온 생애에 걸쳐서 전혀 병이라고 할 만 한 병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병에서 회복되자 런던에 있으면서 하던 대로, 파리에서도 학자들을 찾아갔다. 당시의 아주 교양 있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오, 여러 과학의 위대한 두둔자 이기도한 대승정 비뇨는 흔쾌히 임마누엘을 맞이하였고, 그의 연구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대승정은 이름 높은 수학자인 폴 바리논에게 그를 소개하는 글을 써 주었는데, 교수는 그를 천문학자 드 라일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 젊은 학도는 파리에서도 달에 의한 방법의 좋은 점을 과학자들에게 알아듣게 하는 노력이 꺾인 것처럼 보인다. 수년 후에야 겨우 그것을 영국 왕립학사원에 제출하였으니까, 그는 끊임없이 그 연구에 집중하였다. 그는 스웨덴 사람의 한 무리와, 그를 그 연구에 전념치 못하게 하는 자들과의 교제를 피하였다.

 

편지 쓰는 것조차 멀리 하였다. 그는 벤세리우스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에게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과 존경을 품고 있다는 것을 믿어 주세요. 그래서 내가 소식도 없이, 편지를 써 보내지 않는 것을 나쁘게 생각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죽을 때까지 당신의 마음의 벗, 임마누엘 스베덴보리로부터” (파리, 1713년 [25세]).

 

그런 파리 체재가 끝나갈 무렵에 임마누엘은 친구 몇 사람과 파리관광을 나섰다.

 

1714년 [24세]이 끝나갈 무렵, 고국에 돌아갈 즈음에 로스톡이라는 조용하고 자그마한 한자 동맹의 항구에서 의리의 형에게 다른 편지를 썼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어서 지금껏 난잡하게 종잇조각 여기저기에 써 갈려둔 연구라든가 여러 생각들을 모두 정리할 시간이 있는 곳에 오게 되어 몹시 기쁩니다. 지금까지 내게서 빠져 있었던 것은 그런 것들을 정리할 곳과 시간이었습니다. 그 일을 지금 나는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 발명된 기계 열넷의 표가 적혀 있고, 그것을 이 청년은 개발했다고 말하면서, 그림과 기사(記事)로써 풀이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스웨덴에 돌아가서 인쇄하고자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아버지께서 그 그림을 잘못 간수해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표에 적힌 몇 가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음악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라도 악보에 적힌 어떠한 곡도 연주할 수 있는 만능악기.

 

『하늘을 나는 수레, 또는 공중에 매달려서 공중을 운행할 수 있는것』

 

『사람 마음이 원하고 바라는 것과 애정 따위를 , 정신분석에 의하여 알아내는 방법』.

 

“나는 내가 내 계획과 생각을 말하는 것이 지나쳐서, 아직 아무것도 하나 실지로 보여주지 못한 것에 일종의 치욕을 느낍니다.

 

이 발명들은 잠수함, 비행기와 너무나 닮았고 정신분석방법까지도 들어 있어서 오늘날 이 방면의 발명품에 주로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닮고 있으며, 임마누엘의 뛰어난 마음과 꿋꿋한 기운(기개)과 너른 마음(도량)의 높은 발명 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로스톡에 머무르는 동안에, 그는 최근의 지은 시를 차례대로 정리하였다.

 

그는 오빗드의 빗댄 이야기(우화)같은 것 몇을 써서 『그 중에서 유럽에서 지난 14,5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다루었다』. 이 시는 『북쪽 나라의 뮤즈 신(神)』이라는 제목으로, 스웨덴 민족을 적고 또 옛 고드 민족의 불새(불사조), 북쪽 나라의 임금 챨스 12세의 지도 밑에 있는 스웨덴의 앞날을 예상하고 있다.

 

이 시와 『헤리콘의 경기』라고 제목붙인 다른 시모 음을 인쇄하려고 스베덴보리는 그라이 후스발드로 갔다. 그러나 정치의 속형편(정세)은 이 청년의 흘러넘치는 시정(詩情)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러시아는 스웨덴 땅 핀랜드에서 무서운 전쟁을 시작하여, 언제든지 러시아 함대가 스웨덴 바닷가를 공격하여 부술 수 있다는 위협 밑에 있었다. 챨스 왕은 터키를 러시아와의 싸움에 끌어 들이는데 실패하고, 유럽을 거쳐서 귀국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임마누엘은 그라이후스발드에서 만난 베르날드 궤델홈과 , 다른 한 무리인 제나라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그들은 터키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정말로 『북쪽 나라의 왕』은 단 두 사람의 수종드는 사람을 거느리고, 남몰래 쏜살같이 말을 달려 포메라니아에 닿고, 단지 20일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11월 10일 밤에 스트라르슨드에 이르렀다. 그는 몹시 지쳐있었고, 장화는 베내야 할 만큼 발은 부풀었으나, 마지막 일천 마일을 8일 동안에 단숨에 달렸다.

 

 

이 일은 젊은 시인의 상상을 불러 일으켜서, 왕의 포메라니아 도착을 기리는 『축하의 노래』를 쓰게 하였다. 『비록 백성은 죽은 듯 지쳐 있어도, 임금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다시 숨이 돌아와 새 생명을 얻나니』. 『땅에는 꽃이 다시 피어나, 기쁨은 흘러넘치네.』.

 

이 산문시는 가장 뛰어난 스베덴보리가 지은 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스베덴보리도 4년 남짓 고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고향생각이 간절한 면도 있었다. 그라이후스발드에는 대단한 것이란 별로 없었다. 학원은 수준 아래였고, 수학 교수는 『수학 아닌 것에는 적합하였다』. 그는 기계를 장치하는 일에 손을 댓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다시금 그의 마음은 크리스토파 포르헴에게로 향했다.

 

“나는 지금 고국 스웨덴에 돌아가서 포르헴의 모든 발명품을 손에 넣고 그 그림을 만들고 설명을 더하여 거기에 물리학, 역학, 정수학, 수리학을 관련시키고, 대수의 계산도 함께 올려서, 그것을 다른 곳은 말고 스웨덴에 공개해서 과학협회의 개척자가 될 만한 것을 세우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하여는, 포르헴의 발명품 중에는 극히 뛰어난 기초가 있습니다. 내가 발명한 것도 거기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로스톡 1714년 [26세] 9월 8일).

 

 

그는 또 그의 피붙이에게도 다정한 생각을 돌리고 있다. “안나 누님에게 부디 부디 잘 되기를, 누님께서 러시아 군의 침입에 놀라지 않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작은 조카 에릭도 한 번 만나봤으면 합니다. 아마도 벌써 에릭은 내가 자를 갖고 오면 내게 세모 골을 그려 줄 수가 있겠죠. (에릭은 벌써 아홉 살인 것을 임마누엘이 잊어버린 것일까).

 

 

귀국을 서두르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포메라니아는 이 학도에게는 좋아할 곳이 못되었다. 25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스트라르슨드에 왕은 지금 덴마크, 페르샤, 하노바 연합군에게 갇혀 있었다. 『에워쌈이 시작되려고 할 때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로 요트를 타고 겨우 4년을 넘게 외국에 있다가, 훼이흐 부인(군사참여관의 아내)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고 나중에 그는 돌이켜 보고 있다. 이 일은 1715년 [27세] 5월 또는 6월의 일이다.

 

천천히 스트라르슨드 방어선은 격파되어 12월, 챨스는 보트로 도망하여 항구 밖에 닻내림하고 있는 가리선(大型船)을 탔다. 그는 15년이나 되는 나라 밖 삶을 한 뒤에 남 스웨덴 도레르보리에 상륙했다, 그는 짓눌리고 지쳐 빠졌으나 여전히 그의 거만한 마음은 부수어지지를 않았다. 그는 충고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고집 세고 일의 이치에 밝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의 용기는 대단하였지만, 그는 나라를 진구렁 속에 빠뜨리고야 말았다. 그래서 스웨덴이 발트 해의 한쪽 가에 갖고 있던 최후의 조그마한 땅마저 잃게 되었다. 징병은 이보다 더 가혹 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고, 싸움에 들어가는 돈은 재정을 파멸 시켰고, 나라는 위태한 형편에 처해 있었다.

 

스웨덴이 외국에 진 많은 빚의 금조차도 연간 수입을 훨씬 넘었다. 터키에 밪진돈을 갚는 것만도 24년이 걸려야 했다. 일의 형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보고 성미가 못된 왕에게 충고를 하려고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할머니이며 국민에게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황태후 헤드빅 에레오노라 였다. 챨스가 그 충고를 받아들여서 비록 땅 얼마를 잃으면서도 화평을 꾀했으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일 년 후, 그 황태후의 죽음은 임마누엘을 움직여 추억하는 시를 쓰게 했는데, 그것은 황태후뿐만이 아닌 조국을 위한 슬픈 노래요, 동시에 그의 시가에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여러 번, 승리를 축하하며 월계수 잎으로 관이 씌워진,

영화로운 시의 여신이여!

지금은 승리의 표가 바뀌어,

슬픔의 표, 싸이프레스 잎을 이마에 두르고

슬퍼하여라. 지금은 아니 계신 분을 위하여!

 

스웨덴의 용사들아,

너희들도 칼끝을 아래로 드리우고,

그 관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빌어라.

슬픔의 상옷을 몸에 두르고

얼굴을 숙여 네 가슴을 쳐라.

 

스웨덴이여,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고드 족의 조국이여,

슬퍼하라.

 

수많은 백성과 씩씩한 전사들을 키워온 나라여.

 

슬픔과 미친 손으로, 네 머리카락을,

옷을 찢으며, 슬퍼하라,

그분의 무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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