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생애와 신학사상

부른스보에서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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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14.12.219
 부른스보에서

 

 

스베드베리 감독은, 아들 임마누엘이 외국에 유학하여 그 학업을 마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1709년 [21세]5월, 스톡홀름에 머무는 동안, 왕의 서기관에게 여행허가서를 신청했다. 감독은 졸업식을 마치고 아들과 네 살 난 손자와 에릭 벤세리우스를 따라서 부른스보에 갔고, 거기에서 임마누엘은 8월 1일쯤, 영국으로 떠나고자 했다. 임마누엘은 자형에게 편지를 써서, 런던에 있는 영국학사원 회원 중 몇 사람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부탁했다. 그것은 물리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는데 편의를 얻기 위해서 이었다.

 

그 편지에서, 그는 과학의 지식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 주제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모아들이고, 또 훌륭한 스웨덴의 발명가이며 기계의 천재인 크리스토퍼 포르 헴이 지은책을 꼭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포르 헴은 “생명에 관계된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발명에 관한 것을 설명하고, 세상에 출판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고 말하고 있다.

 

포르 헴의 자료는 자기가 장차 공개하고자 하는 책인 『수학』의 값어치를 더 높이게 될 것이라고, 임마누엘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목적이 현실로 나타나는데 는 몇 년이 걸렸다. 영국에 가는 것도 늦추고 14일 동안 머물기로 한 예정을 바꾸어 만 1년간을 스카라에 머물렀다. 그 때의 스웨덴은 전쟁상태이고, 적국의 하나인 덴마크가 바다의 주권을 갖고 있어서 영국 유학을 거의 할 수 없게 하였다.

 

다른 이유는 그의 나라의 형편이었다. 스웨덴은 원정중인 군대 필수품을 채우려고 온 힘을 모으고 있었는데, 거기에다 돌림병까지 생겼다.

 

패전의 연속과 흉년농사로 백성들의 고달품은 극에 이르렀고, 흑사병이 동남쪽에서부터 유럽을 거쳐 스웨덴에 가까이 왔고, 흉년농사의 땅은 마치 주검의 대풍년을 이룬 꼴이 되었다.

 

1710년 [22세], 스웨덴 정부는 돌림병이 퍼진 곳의 항구를 나온 배는 40일간 검역소에 붙잡아두어야 한다는 명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대할 꾀(대책)에도 아랑곳없이 여기저기로 그 병은 퍼져나갔다. 스톡홀름에서만도 인구의 1/3인 2만 명이 죽었다.

 

그때 이거리의 남쪽 구역에 살던 리이세리우스 박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1711년[23세] 1월 13일, 나는 큰마음을 먹고 그곳으로 가 보았다. 어디에 가나 집은 텅 비어있었고, 사람은 없었다. 아는 사람은 죽었던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집에도, 공장에도, 사람의 그림자란 없었다.”

 

더더구나 그 지실(재해)에 충격을 더하는 격으로 왕이 러시아의 뿌르다바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베덴보리의 삶의 처음기간은, 그가 태어난 나라의 운명과 아주 바짝 닿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이지실(재해)을 불러오게 한 수많은 사건을 조금만 말해 보겠다.

 

1697년 [9세], 왕 챨스 11세가 죽고서 귀족들은 투표로써, 15세 된 아들 챨스에게 왕을 이을 자로 뽑았다. 그들은, 이 어린 소년은 다루기 쉬워서 그의 아버지 밑에서 잃었던 세금이 면제된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왕에 대한 헌신의 보수를 거둬들이던가, 아니면 전쟁에 휘말려들 처지에 빠졌다. 스웨덴의 적국은, 스웨덴이 계속되는 기근으로 약해지고, 경험도 없는 소년에게 지배되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지금이야말로, 스웨덴을 쳐서 잃었던 발트의 여러 주(洲)를 되찾는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베드로 대제는 폴란드 왕과 함께 꾀하여 스웨덴 공략의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덴마크의 푸레데릭 2세가 나중에 동맹에 들어왔다. 이들 세 나라의 군대와 자원을 모두 합친 것은 스웨덴의 열 곱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 젊은 왕의 정력과 능력은 금세 사건의 흐름을 바꾸었다. 챨스 12세는 재빨리 덴마크에 싸움을 걸어서, 이를 눌러 이로운 평화조약을 맺었다. 강력한 러시아 군대가 에스토니아의 나르바를 둘러쌌다. 이것을 적은 수인 스웨덴 주둔병이 죽기로 지켰다. 챨스는 둘러싸인 서울을 건지기 위하여 군대를 몰고 1700년 [12세] 11월 20일, 훨씬 강대한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 젊은 왕의 무용과 전술은 전기 빛처럼 세계에 선전되어 『북쪽나라의 사자』는 유럽 지역의 기림말(찬사)을 들었다.

 

만약, 이때에 싸움을 그만두고 러시아와 그가 받을 수 있는 강화조약을 맺었다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되어 나갔을 것인데, 싸움을 그만두기는커녕,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때까지 그는 승리 밖에 몰랐으나 서서히 그는 그 운명적인 뿌르다바 평원에 알짜부대를 내몰아 거기서 박살되어 벳사라비아 평원을 넘어서 흑해에 있는 터키 땅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터키는 그를 한 명예로운 죄수로서 가두었다.

 

스웨덴은 바야흐로 왕을 빼앗기고, 다시 덴마크의 공격을 받았다. 덴마크 왕이 갑자기 헬싱보리(Helsingborg) 거리로 쳐들어왔을 때에 스웨덴 사람은 그 마음속에서부터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끓어올랐다.

 

나라는 매우 쪼들렸고, 전쟁의 비용은 파국적으로 막대하였으나, 국민은 용감하였고, 고난을 견뎌내고, 자기의 가족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데도 후회하지 않았다. 농부로 짜여진 한 부대가 나라사랑의 뜨거운 마음에 불타서, 낫과 갈퀴로 무장하여 마구누스스텐복(Magnus Stenbock)의 지휘를 받으며, 덴마크를 쳐부숴 그들을 나라 밖으로 내 쫓았다.

 

어린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그 승리에 감동하여, 스텐복에게 드리는 『승리의 노래』를 썼다. 그는 부르스보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다른 몇 개의 시를 써서 공개하였고, 책을 만드는 기술과 음악을 배웠고, 교회에서는 오르간 반주로 봉사했다.

 

그는 그 전의 가정교사 요한 모레아에우스와의 친교를 새롭게 하였다. 모레아에우스는 지금은 의학의 학위를 얻고 프랑스에서 돌아와 다시 스베드베리 감독 집에 살고 있었다.

 

임마누엘은 모레아에우스가 근처에서 발굴한 거대한 해골을 조사하고, 이 『중세기 거인의 뼈』를 웁살라 박물관에 보냈다. 거기에 있는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것은 고래의 화석이라고 언명한 사실은, 그 뼈가 바다에서 124마일이나 들어와 있는 뭍에서 발견된 것이기에, 그에게 기이한 느낌을 품게 하였다.

 

임마누엘은 부득이 하여 생긴 짬을 주체 못하였다. 부른스보는 과학 연구에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다. 나는 시간을 거의 헛되게 보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더 있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그는 하소연 하고 있다.

 

그의 피난처는 벤세리우스 이었다. 벤세리우스는 자유로운 탐구 방법을 구하는 운동의 지도자요, 그 때의 맨 앞쪽에 선 학자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임마누엘의 애정은 두 사람 사이에 나눈 편지 가운데의 한 편지에 나타나 있다.

 

“나는 내 형제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할 뿐 아니라, 당신을 나의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자형인 그도, 이 애정에 응하여 임마누엘을 대단히 사랑하여, 그가 유럽의 학자들과 가진 열여덟 권에 이르는 편지 왕래 속에, 스베덴보리에게서 받은 편지 50통이 실려 있고, 그것이 그때부터 우리들의 손에 남겨진 아주 귀중한 전기상의 재료가 되어 있다.

 

“나는 지금 내가 포르 헴과 함께 머물러 있고자 하는 계획에 대하여 적으나마 의견을 말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고 임마누엘은 1710년[22세] 3월에 썼는데, “만약에 나의 외국 여행이 내년 3월까지 연기된다면, 그 때에는 잠시 동안이라도 내가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아주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마도 그곳에서는 겨울보다는 여름에 더 이익을 얻게 되고, 어떤 일도 그곳에서는 대단한 활기에 넘치겠고, 또 즐겁기도 하고, 마음도 더 좋은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크르스토퍼 포르 헴은 스베덴보리의 삶 처음 기간에 지도적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포르 헴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괴로운 경험을 겪은 후에 마침내 기계를 손질하여 원모 습대로 하는 기능을 나타내고, 그 발명의 재능 때문에 유명해 졌다. 그는 자주 수학으로만 풀릴 수 있는 문제에 부닥치곤 했는데, 수학 교과서는 모두 그가 모르는 라틴말로 씌어져 있었다. 포르 헴은 배울 때가 지났고, 거기에다 재산힘(자력)도 없었으나 그래도 라틴말을 배우기로 마음을 정했다.

 

어떤 날 그가 고용된 땅의 교회사에게서 기둥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그에게 새로운 생활이 찾아왔다.

이 젊은이는, 만일 목사가 나에게 라틴말을 가르쳐 준다면 저는 한 시간, 반시간, 십오 분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나중에 그는 웁살라에서 그의 늦공부를 완성하였다.

 

포르 헴은 그 때도 지금처럼 스웨덴에서 아주 중요한 산업인 광석 채국에 그 뛰어난 재능을 사용하였다.

그는 광석을 끌어 올려서 큰 도가니에 옮겨서 통속의 강돌을 비우고 다시 통을 굴대로 되돌리는 그 모든 것이 물의 힘으로 한결같이 행해지는 기계를 발명했다.

 

그는 제도를 만들지도 않고 여러 가지 새로운 기계를 만들었다. 머지않아서 독일은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포르 헴에게 광산기사를 보냈고, 만일 그가 독일에 산다면 매우 좋은 대우를 하겠다고 간절히 청하였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포르 헴은 비록 그의 나라가 가난해서 받기에 합당한 돈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라를 사랑하였고, 낟알을 빻는 맷돌이라는 농사에 쓰는 연모를 설계하여 챨스 12세의 군대를 크게 도왔다.

 

포르 헴은 약간의 생도를 하숙을 시켜 가르치고, 때로는 많은 사례금도 받았다.

벤세리우스는 임마누엘의 청을 받아 친구인 야곱 트로이리우스에게, 편지로 스베덴보리를 생도로 받아 줄 것을 포르 헴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포르 헴과 그의 아내는 모르는 사람은 집에 들이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으나, 스베드베리 씨는 대단힌 은혜로서 맞고 싶은 심정이라고 대답을 했다. 사실 그는 임마누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리하고 지적인 생도는 실험에서 나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스베덴보리는 포르 헴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때 스웨덴과 싸우고 있는 덴마크에 붙잡힐 위험이 있고, 또 영국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에 귀찮게 보일 염려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영국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선장의 말을 듣고서 배를 타겠다는 계약을 하고 1710년 [22세] 4월 상순에 영국으로 떠났다.

 

스베덴보리는 공학을 통하여 과학에 다가서지 않았고, 그때의 최대의 과학자, 사상가 몇 사람과 친교를 가진 후, 뱃도락(독, 선거)과 운하를 쌓아올리는 일에 달려 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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