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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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분위기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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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14.12.219

대학의 분위기

 

대학의 분위기는 바탕 다른 것으로 팽배해 있었다. 17세기에는 학문과 종교의 모든 문제는 그 해결을 교회에 맡기고, 본바가 맞지 않을 때에는 교회의 법령에 의하여 가리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그 교리에 알맞게 풀어 밝혀지거나, 색칠되어서, 그때 사람을 훈련하는데 는 올바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때, 교회의 끈질긴 부르짖음과 외침위에 다른 쪽에서 드높고 맑은 높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지나서 곧 온 유럽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고 또 바탕이 다른 것이었다.

학문세계를 놀라게 한 그 소리는 바로 데칼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데칼트의 연구는 스콜라주의와- 철학에서의 문제는 문서에 의하여 또는 권위 있는 사람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써 해결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과는 - 맞바로 맞서는 쪽으로 이어져 나갔다.

 

그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하는 올바른 방법은, 그 모르는 것에 대하여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을 배우는 일이 아니고, 제 스스로 연역(演繹)하고, 제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일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는 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그 방법을 수학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수학은 그러한 독립한 결론이 허락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학에서는 단일명제에서 출발하여 미지(未知)의 것을 향하여 간다고 그는 말했다. 그와 같은 방법을 다른 주제에는 어째서 맞춰 쓰지(적용)않는가. 철학에서의 미지의 분량을, 왜 일종의 보편적인 수학과 조직적인 학문에 의하여 해결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진리에 이르는 직접적인 길을 탐구할 때에, 산수와 기하가 증명하는 그 확실함에 맞먹는, 확실하마에 이르지 못하는 것에 , 우리자신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법매김(규정)은 단지 자연계의 진리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는 또 직각(直覺)을 믿고 있었다. “제일원리는 직각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고 그는 말하며, 직각을, 이성(異性) 그 자체의 빛에서 생기는, 의심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직각은,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데칼 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공리(公理)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데칼트의 소문은,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귀에도 미쳤고, 그 왕은 이 독창적인 사색가를 북풍이 거칠게 부는 해안에 초청하였다.

 

이 해안에서 이 위대한 학자는 몇 달이 못가서 폐렴으로 죽었다.

그러나 데칼트의 철학은 웁살라 대학에, 사고의 자유를 원하는 훼에 불을 댕겼다. 의학부와 신학부와의 사이에, 철학 상의 자유에 대한 큰 논쟁이 일어났다. 때로는 교회가 이기고, 어떤 때에는, 구속을 허락하지 않는 탐구의 옹호자 쪽이 이겼다.

 

“신앙의 내용은 성령에 의하여 정해지지만, 물리의 내용은 성령에 의하여 정해지지 않는다.” “웁살라 대학 철학과에는 사제가 교수직에 있으면 안 된다.” 드디어 사태는 분규로 번져, 왕인 찰스11세의 결재를 얻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왕은 다음과 같이 포고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의는 철학의 비판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다른 일에 대하여는, 철학은 실 제면이나 논의면 에서도 자유다.” 이 결과로 17세기말까지는 스웨덴에 있는 주요한 학문의 마당에, 생각하는 자유의 법안이 확립되어, 자유는 과학을 탐구하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이것이 1699년 [11세]6월 15일에 임마누엘의 이름이 웁살라 대학 입학생명부에 적힐 때의 대학배경이었다. 그의 이름 다음에는 “수석목사. 교수의 아들. 재능이 뛰어난 소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같은 날 다레카루리아 구락부의 부원으로도 되었다.

 

생도 하나하나는 이 구락부의 어느 하나에 속하고, 구락부는 스웨덴의 여러 지역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른바 이 <대학생들>은 - 그 중에는 11세밖에 안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동갑내기와 아주 닮았다는 것이 학장의 훈시와 게시판 고시내용에서 명백한바, 거기에는 새로운 성스러운 정원을 망쳐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기는 자는 벌을 받는다고 적혀 있었다.

 

대학에는 신학. 법학. 의학. 철학 이렇게 네 학부가 있고, 철학에는 과학과 수학이 들어 있었다. 스웨덴보리는 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벌써 가정교사에게서 라틴어의 기초는 익히고 있었지만, 수업은 모두 라틴어로 하기 때문에, 우선 라틴어의 지식을 완벽하게 하는데 힘썼다. 그리스어는 일 년 후에, 히브리어는 그것보다도 뒤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의 당당한 예복을 입은 이름난 교수들의 그림얼굴(초상화)이 지금도 남아 있다.

 

천문학교수인 베엘 엘피우스(Pher Elfvius)는 손에 육분의(六分議)를 들고, 해부학교수 라르스 로베리(Lars Roberg)는 머리뼈(두개골)를 들고, 해랄드 봐레리우스(Harald Wallerius)는 손을 데칼트의 저서 위에 올려놓고 있다.

 

스베덴보리는 고전어를 배우고 익히는데 정신과 혼을 기울이면서도, 자연과학과 수학 연구에 정신을 쏟았다.

 

그는 이때부터 시를 쓰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지은시 가운데서 알려진 최초의 시는 <고귀하시고 참으로 깊은 학식이 풍부하신 요하네스 고루모덴 씨와 정결한 처녀 베아타헷세리아양>의 혼인을 찬양하는, 스웨덴 말로 된 열두 줄 시(十二行詩)인데 , 열두 살 소년이 지은 시로서는 뛰어난 것이다.

 

그 마지막 절은 이러하다.

 

하나님이시여, 바라옵기는

이 두 사람이 천사처럼, 남편과 아내로서 살며,

복 많은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기를,

이 두 사람, 오늘의 혼인을 위하여,

매무새를 다듬어 서 있듯이,

언제나 거룩하신 당신 앞에,

당신의 신부로서 서게 하옵시기를, ※1)

 

 

교회전통이 허락하는 한, 웁살라 대학의 학풍은 자유주의적이며, 낭만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학장인 오로프 루드벡(Olof Rudbeek) 교수의 당당한 모습에 지배되었다. 이 위엄을 갖춘 문학자는 그의 이름난 저작인 「애트랜티카(The Atlantica)」에 의하여, 먼 곳과 가까운 곳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 책에서, 플라톤이 애트랜티스 곧 옛날의 신들과 영웅의 생겨난 곳(발상지)을 적을 무렵에, 그는 루드벡의 나라 스웨덴의 생겨난 곳 이외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발표하고, 그 주장을 언어면 에서 길게 상세하게 실증하였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환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당시의 미신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로서는 온통 지지를 받았다. 그 생겨난 곳에는 헤스베리데즈의 사과가 열렸고, 루드벡은 이렇게 추운 곳에서 포도는 찾아낼 수 는 없었지만, 스웨덴에서 빈 벨(Vin-bal)이라고 불리는 스구리 ※2) 가 그 포도라고 주장했다.

 

 

1702년 [14세], 5월 17일 밤, 웁살라에 불이 나서 때마침 불어 닥친, 강풍으로 14시간 만에 거리의 3/4 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거센 불길에 싸인 스베드베리의 집을 건지려고 죽기 살기로 달라붙었다. 지붕, 창문, 문짝은 타 버렸지만, 큰 거실에 있던 금을 입힌 성서의 금언은 그대로 남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 계명을 지켜라」고 쓰여 있다.

이 일은 에스 바에게, 하나님의 말씀(聖言)은 옛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었다.

 

그 다음해[15세] 에스바 스베드베리는, 스웨덴 중부에 있는 스카 라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웁살라와 학생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부른스보의 감독사택에서 살았다. 스베드베리는 아들과 함께 다레카 루리아 클럽의 한 사람이고, 당시 그 관리자였다.

 

학생들은 헤어지는 선물로 구리돈 327 다레르 ※3) 나 되는 값비싼 은촛대 둘을 드렸다. 그는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좋은 충고를 많이 주었다.

 

“나는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른 모든 훈련이나 모든 연구나, 모든 면학은, 무익하고 해롭습니다.” 특히, 그는 학생들에게 “당신들은 세 가지 일을 당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곧 그 하나는 경건인데, 날마다 성서를 읽어 그 정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되며, 다음이 특수한 직업을 선택하는 일이고, 셋째가 화합을 위한 노력이다”고 가르쳤다.

 

감독과 아내는 두 어린 딸을 부른스보에 데려가고, 15세 된 임마누엘, 여동생 헤드빅(Hedwig)과 두 형제를 17세 된 누나 안나(Anna)에게 맡기고 갔다. 안나 는 그해 봄, 도서관원인 에릴 벤세리우스(Erik Benzelius)와 혼인하였다.

 

임마누엘은 그의 남은 학생시절을 누님 집에서 보냈으며, 벤세리우스를 제 2의 아버지로서 존경하였다. 임마누엘의 두 형제, 에리에셀과 에스바는- 에스바 스베드베리의 다섯째 아들 다니엘은 어려서 죽었다- 임마누엘이 지은 「혼인의 노래」 중에서 축하한 [정결한 처녀 베아타]의 형제 헷세리우스를 가정교사로 맞이했다.

 

그의 젊은 아내 안나 는 그의 형제 네 사람과 여동생 한 사람 외에 그의 시집 식구들도 돌봐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떠들썩한 가족이었을 것이 틀림없었으리라.

 

에릭 벤세리우스는 - 그의 가정에서 임마누엘은 6년간 신세를 져야 했지만 - 스베덴보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벤세리우스는 열렬한 데칼트의 신봉자로, 앞으로의 학문은 과학의 얼안(영역)에 있다고 굳게 믿고, 그때의 뛰어난 학자들과 오래 오래 편지를 나누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의 흐름에 맞대었다. 임마누엘은 웁살라를 떠나기 이전에, 학문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그로 인하여 북돋아졌는데, 그 스스로 밝히 말하는 바대로, 매형에게서 그 때에 정밀과학이라고 불리는 수학을 전문연구(전공)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임마누엘의 청년시대에서 어른 초기의 삶에 대해서는, 적지만 그 클럽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1704년[16세] 가을, 그는 학우들에게 뽑혀서, 「하나님의 섭리」란 제목을 단 토론에, 세 사람 중에 하나로 참가했다. 다음 학기에서는 「결혼과 양친과 자녀의 의무」라는 토론에 참가하였다. 나중에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토론에서는, 자진해서 사회자의 일을 보겠다고 했지만, 이것은 거절되었다. 이유는, 그는 아직 하급생이었고, 하급생이 상급생의 특권을 너무 해치는 것은 나쁜 선례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 숨은 이야기(에피소드)는 젊은 임마누엘의 비상한 내뛸성(적극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법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칙은, 그의 전문직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1706년 [18세], 여동생 헤드 빅은 수사(修士) 학위를 얻은 안드레아스 리세리우스라는 학생의 졸업을 맞아, 그를 위하여 금. 모올로 비렛타(사각형모자)를 만들고, 벤세리우스는 스톡홀름에서 긴 머리의 덧머리(가발)를 가져와서 주려고 했지만, 그는 자기 머리카락이 더 잘 어울린다면서 그것을 물리쳤다고 적혀 있다. 그 덧머리는 나중에 에릭의 아우, 리루스 벤세르 쉐르나(Benzelstjerna)가 썼고, 나중에 그는 헤드빅과 혼인하여 임마누엘의 매제가 되었다.

 

1709년 [21세] 6월 1일은 임마누엘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가 졸업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뜻의 학위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기품이 있는 꾸밈을 하고, 연단에 올라가서, 아버지 바로 앞에서, 그가 쓴 졸업논문을 읽었다. 아버지는 심사원으로 뽑혀서, 멀리 스카라에서부터 여행을 하여 식에 참석한 것이다. 임마누엘은 키가 보통이고, 살짝 튀어나온 아래턱은 아버지를 쏙 빼 닮았지만, 얼굴모양은 , 어머니를 닮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도톰하고 다감한 입술과 달리, 그의 입은 사라베엠의 온화하고 상쾌한 표정을 간직하고, 이마는 조금 높아 무지개문 꼴(아치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엷은 웃음과 푸른빛을 띤 거무스레한 눈은, 가장 눈에 띠는 임마누엘의 특징이었다. 그가 읽어나가는 동안 그의 말은 더듬거리기 일쑤였다.

 

그의 논문은 「프프리우스 스이르스 미므스와 L. 안나에우스 세네카의 금언」이라는 라틴어 문필가들에 대한 덧풀이(주석)었다. 그것은 인쇄되어 있으나, 그 2/3은 따옴글(인용문)이고, 1/3은 스베덴보리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토론 내용을 가진, 그 교사의 이런 경우, 마기스텔 화비안 타나의 가르침을 두둔(옹호)하는 것이었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이들에게 없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것은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다.」

「당신의 친구가 지은 죄는, 당신이 그 친구를 훈계하지 않을 때에는, 당신에게 돌아간다.」

「우연히 그 표적에 이르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마음을 빼고서는, 당신 안에 놀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위대한 자 중에도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활은 팽팽해지면 꺾이고, 마음은 느슨해지면 꺾인다.」

 

 

「이 맞춰봄(대조)은 더 없이 훌륭하다」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그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활이 팽팽해지면 꺾이듯이, 마음은 느슨해지면 부서지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과 꼼꼼히 잘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양식과 같아서, 마음은 계속하여 영양을 얻음으로써, 지탱하지 않으면 쇠하고 만다.”

 

 

이 논문은 스베덴보리가 조금도 겉으로의 (피상적)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주목이 된다. 거기에는 뛰어난 라틴말의 부려 씀(구사)과 고전에 널리 정통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만, 그보다 더 , 그의 성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또 그가 앞으로 쓰게 될 책을 미리 나타내고 있다.

 

그가 삶의 마지막 30년을 성서의 뜻을 풀어 말하는데 바친 것을 생각하면, 그가 그리도 일찍부터, 그 졸업논문의 으뜸제목으로서 고전의 덧풀이를 뽑았다는 것은, 확실히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금언모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아버지에게 바쳤다.

“바라기는 이아들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라서, 아버지 이름에 명예와 명성을 끼친 저 수많은 일을 따르게 되기를, 마음과 품성뿐만 아니라 그 저작도 따르도록!”

 

 

그 졸업식을 축하하고, 인쇄에 부친 그 작은 책의 머리말로서 시문(時文)을 적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 시문을 리세리우스가 썼다. 그는 3년 전에, 임마누엘의 여동생 헤드 빅이 만든 비렛타 모자를 쓰고 졸업한 긴 머리를 한 청년이었다.

 

이 시문은 예언적인 시행(詩行)으로써 맺고 있다.

 

나는 굳게 믿는다.

당신은 조국에 유익한 사람과,

그리스도 교훈의 번영이 될 것을,

영원한 뮤즈 신(시와 노래를 주관하는 여신)은

그대에게 영광스러운 소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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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년 스톡홀름에서 출판된 「스베덴보리의 시 모음 (Opera Poetica Emanuer Swedenborg)」 1~2쪽

※2) 호이초과(虎耳草科)에 딸린 상록초. 호이초(虎耳草) (옮긴이)

※3) 그때 농부가 벌어들이는 한 해의 평균 수입은 6 다레루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값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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